<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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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특별히 요염한 것은 아닌데,이 미인에겐 물을 함빡 빨아들이는모래처럼 강한 흡인력이 있다.
우선 감미한 눈매가 그렇다.
살결이 투명하고 촉촉하다.
늘씬한 몸매는 무슨 옷이든 잘 소화한다.
그림을 전공해온 길례도 옷 빛깔은 어지간히 맞춰 입는 편이다.그러나 아리영의 입음새엔 어려서부터 고도의 색감 훈련을 받아온 자만이 터득한 센스가 있다.
이런 여성에게 끌리지 않는 남성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김사장이 아리영에게 설혹 호의를 가졌다 해도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남자다움에 여자가 끌리듯 여자다움에 남자가 끌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 아닌가.
이같은 자연스런 외경심에서 남근석(男根石)이나 여음석(女陰石)에 대한 숭배 풍습도 움텄을 것이다.
정읍에는 선돌이 많다.
삼국시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세워졌을 키 높은 선돌들이 아직도마을 곳곳에 우줄우줄 솟아 있다.
그저 비석같은 밋밋한 선돌도 많으나 돌의 일부를 다듬어 눈 코 등을 새긴 장승 모양의 것도 있고 남근 모양도 있다.
길례 일행이 그 앞에서 기념촬영까지 한 백암리 원백마을의 남근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화강석이었다.높이 1백65㎝,둘레 88㎝의 원통형.일명 「자지바우」,전라북도 민속자료 13호로 지정돼있다.비스듬히 치솟은 품이 아주 사실적이다.
이 돌 바로 앞에 「보지바우」라 불린 여음석도 있었다지만 요즘은 치워져 없다.
한 3백년 전인 조선조때 세워진 것이라니 그리 오래된 남근석은 아니다.
3백년 전이라면 「정읍사」를 음란가사라 하여 개사(改詞)한 중종때부터 1백50년 가량 지난 다음의 일이다.
그때나 중종때나 남근석과 여음석을 나란히 놓아 풍요와 득남(得男)을 빈 소박한 신앙심을 「음란」이라 나무란 이는 없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정읍사」가 야한 노래였다면 그 또한 풍요와 아들 낳기를 비는 마음으로 읊어진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사되었다.
중종은 형 연산군(燕山君)을 내몰아 왕위에 오른 임금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그 서슬퍼런 개혁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정읍사」는 개사당한 셈이다.
이 언저리에 노래의 비밀도 있어 보인다.
『아무래도….』 길례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야한 말마디 뒤에 뭔가 정치적인 뜻을 숨기고 있었던 노래인것만 같아요.』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서여사가 약주 잔을 놓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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