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택시가 구기터널 입구까지 가서 내가 택시를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터널을 지나지는 않았거든요,다시 한번 유턴해서 내려가주실래요.』 유턴을 한 택시가 길가에 붙어서 천천히 갔다.나는 한곳에서 택시를 멈추게 하고 길가의 구멍가게로 가서 물어보고 왔다. 『「나락」은 없어졌대.벌써 몇달 됐다는데….』 『그럼 할 수 없지 뭐,아저씨 청량리로 갑시다.』 윤찬이 택시기사에게소리쳤다.택시기사는 서른 살쯤 먹은 사람이었는데 군소리없이 차를 몰았다.청량리 역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면서 택시기사가 슬쩍한마디를 던졌다.
『입대하는 것 같은데…나중에 괜히 고생하지 말고… 놀 때 장화 신는거 잊지마쇼.갑갑하다고 벗어던지지 말고.』 『하여간 고맙수다.충고 잊지 않겠수.자 아저씨도 굿럭.』 윤찬이 택시기사에게 천원짜리 두 장인가를 더 집어주었다.
한밤중의 역 광장은 썰렁했다.광장은 역시 사람들이 붐벼야 광장이었다.썰렁한 광장은 사람들이 붐비는 밀실만큼이나 어색하였다.밤열차라도 들어오려는지 빈 택시 몇대가 광장 구석에 서 있었고,근처의 백화점 쇼윈도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 었다.그 불빛 때문에 광장이 더욱 텅 비어 보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너무 맹숭맹숭해.한잔 더 걸치고 가자구.』 나는 그렇지 않아도 윤찬이의 어떤 제안에도 무조건 따를 참이었다.우리는 역 건너편의 골목에 늘어선 감자탕집 가운데 한집에 들어가서 소주를 두병인가 세 병인가를 마셔댔다.우리는 취했고 그게 우리를 행복한 것처럼 착각하도록 도와주었다 .그 골목을 빠져나오다가 둘 중의 하나가 토했는데 그게 윤찬이었는지 나였는지조차분명치가 않았다.
어쨌든 둘 중의 하나가 토하기를 마치고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역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오팔팔로 들어서는 길의 초입에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파출소 하나가 버티고 있었다.그거야 경찰을 위한 파출소라고,윤찬 이가 정답을아는 아이처럼 고래고래 악을 썼다.하여간 우리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어떤 아줌마가 우리를 각각 방으로 안내해주었다.우리는 각자 볼 일을 보고 파출소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내가 들어선 골방이야말로 진정한 밀실이었다.정액과 분비물의 내음이 화악 코에 들었고 온몸에 배어들 것만 같았다.여자 하나가 나를 누이고 옷을 벗기기 시작했는데,나는 정신이 없어서 여자의 나이가 몇살쯤 되는지도 알지 못했다.여자가 나를 벌거숭이로 만드는 동안,나는 언젠가 상원이와 함께 갔던 화양리의 사창가가 떠올랐고,그때 내가 써니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녔던 일들이 먼 꿈 속의 일처럼 가물거렸다.
여자가 내 물건을 세우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여자의 노력은 수포였다.나는 발기하지 못했다.나는 써니를 생각하면 울음이 날 것만 같았던 그 시절을 기억해내고 싶었다.
『어휴,너무 처마시고 왔어.안되잖아.』 여자가 투덜거리다가 방문을 탁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다른 방에 가서 다른 환자를 보고 돌아올 속셈인지도 몰랐다.외로움과 후회와 혼돈과 그리움에 찌든 환자들 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