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운동권→FTA 전문가→‘국제원조 전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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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386 운동권’ 여대생 출신으로 자유무역협정(FTA) 통상전문가로 변신했던 남영숙(46·사진) 외교통상부 심의관이 20여 년 만에 대학 캠퍼스로 돌아간다. 남 심의관은 2일 외교부에 사의를 표시했다. 이화여대가 그를 국제대학원 교수에 채용키로 지난달 말 확정해서다. 그는 봄학기부터 국제통상 및 정부개발원조(ODA) 담당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남 심의관은 3일 “계약직 공무원 임기가 끝나는 2월 중순까지 한·미 FTA에 이어 한·EU FTA를 마무리한 뒤 젊은 냄새가 풋풋하게 나는 대학 캠퍼스로 돌아가게 돼 벌써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외교부에서는 눈 앞에 닥친 한·중 FTA 등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라 그에게 ‘승진’을 제시하며 퇴직을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캠퍼스로 돌아가겠다는 꿈이 이뤄졌고, 공무원으로 국가를 위해 FTA의 단추를 끼우는 등 여한 없이 일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처음에 운동권 출신이 FTA 협상팀장(통신·전자상거래 분과장)으로 들어가자 ‘매국노’라는 오해도 많았다”며 “국가 경제의 큰 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다 보니 이해하더라”고 털어 놓았다. 다만 미련이 좀 남아 아쉽다고 했다. 정부는 할 일을 다 했는데, 정치권이 4월 총선을 앞두고 FTA 국회 비준을 미룰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는 것이다.

 남 심의관은 “대학에서 ODA 부문에 특히 관심을 많이 가질 생각”이라며 “국제 사회에서 한국도 이제는 돈 번 만큼 공헌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선진국도 인정하는 ‘IT 강국’의 힘으로 어렵지 않게 ODA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중앙일보가 제시한 아젠다 ‘1만명 청년 IT전도사 육성’은 중요한 해법”이라며 “우리도 이제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의 IT를 지원해 국제 사회에서 진정한 선진국으로 대접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중앙일보 아젠다를 정부 정책에 반영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며 “FTA를 비롯한 산적한 과제가 눈 앞에 닥친 데다 공무원 사회에서 ODA는 아직 ‘퍼주기’라는 인식이 많아 독불장군처럼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며 아쉬워했다.

 3월부터는 이화여대를 시작으로 젊은이들에게 ‘ODA 문화’를 확산할 생각이다. 국제(OECD)·IT(정통부)·통상(외교부) 등을 모두 경험했기에 이를 해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는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고, 한국기업이 글로벌 회사로 발전하고, 새 정부가 국제 사회에 대한 기여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남 심의관은 1980년대 초 서슬 퍼런 5공화국 시절 ‘여당실세 남재희 의원의 운동권 딸’로 세간에 화제가 됐던 사람이다. 고려대(경제학과) 재학 중 학생 운동에 뛰어들어 83년 가을 시위 배후 주동 혐의로 한 달여 철창에 갇히는 등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이때 재야 운동가인 예춘호씨의 아들로 운동권 동지인 예종영(47·고려대 정외과) 연구교수를 반려자로 맞아 ‘예춘호의 며느리’로도 유명세를 치렀다. 84년 대학 졸업 뒤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그는 “중국집에서 양가 어른만 참석한 채 간단히 결혼식을 올린 뒤 야반도주하듯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털어놨다.

그는 94년 스탠퍼드대에서 국제개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00년 전후 국제기구(ILO·OECD 등)에서 정력적으로 일하며 국제 전문가로 컸다. 2005년에는 국가 공무원(정보통신부 국제협력팀장)으로 영입돼 귀국한 뒤 FTA 협상에 참여했다. 실력을 인정받아 1년 만에 외교부 국장급에 올랐다.

 그는 이제 ‘남재희의 딸’이 아닌 ‘통상전문가 남영숙’으로 우뚝 섰다. 부친과 시아버지에게 “공무원으로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한 데 이어 국가 인재를 키우는 교수가 되니 너무 흐뭇하다”는 얘기를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이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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