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6.흔적 그리고 예감⑥ 희수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손으로내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냐,우리 하지 마.
나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속으로만 말했다.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아냐,미안한데…난 지금 가야돼.우리 동네 상가 문 닫기 전에 가서 찾아가야 할 게 있거든.』 희수의 오피스텔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프로」라는 말을 떠올렸다.침대에 서도,프로는 과연더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도 했다.집으로 가는 버스에 실려서,나는 희수네 오피스텔에 남아 있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그렇다고 희수가 싫 어진 건 아니었다.나는 어쩌면 희수로부터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름은 여전히 지독했고 장마기가 지났는데도 비가 올 기색은 없었다.몇 십 년만의 더위라고들 하더니 이제는 몇 십 년만의 가뭄이라고 했다.신문이나 텔레비전의 뉴스는 더위나 가뭄이 없었다면 무얼로 다 채웠을까 싶을 만큼 호들갑을 떨어 댔다.아홉시뉴스 시간이었는데,계란처럼 타원형의 얼굴을 한 여자 아나운서 하나는,고속도로의 아스팔트 위에 계란 하나를 깨뜨려놓고는 몇 분 안에 계란이 익는지를 시험해보이기도 하였다.
뉴스 시간에는 거의 매일,물을 긷거나 우물을 찾는데 동원된 군인들이 보였는데,그러면 어머니는 혹시 거기서 형을 찾아본다고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고는 하였다.그런 와중에도 아프리카의 르완다에서는 여전히 난민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죽어가고 있었고,할리우드에서는 어떤 고급 뚜쟁이가 자신의 고객들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발표해서 난리라고 했다.국내에서는〈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노래가 히트를 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노크소리가 났다.전화야.전에 한번 민망한 일이 있고 나서부터어머니는 내 방에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노크를 하셨다.어머니가방문을 열고 무선 전화기를 내게 건네주고 가셨다.
…여보세요…난데…누구야…여보세요… 수화기에서는 뚜 뚜 뚜 뚜…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나이가 몇인데 다 큰 아들을 놀리시우?』 내가 부엌의 어머니에게로 가서 눈을 흘겼다.어머니는 내게 수화기를 내밀 때부터얼굴에 장난기 같은 것이 묻어 있었던 거였다.
『왜? 끊어졌어? 아냐 여자애였다구.그래서 웃은 거라구.너 요새 무슨 실연당한 남자처럼 죽상을 하구 처박혀 지냈잖아.그래서 웃은 거라니까.』 어머니는,희수나 소라의 목소리는 아니었다고 하셨다.나는 더 묻지 않았고 더 생각하지도 않았다.어차피 절대로 써니일 리는 없었으니까.
개학날,소라와 희수와 셋이 오랜만에〈아무데나〉에 둘러앉았다.
윤찬이는 아직 집에 누워 있었는데 두 달 뒤면 입대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에 휴학계를 낼거라고 그랬다.소라는 섬에 있다가 온여자애같지 않게 피부색이 여전히 하얗다.며칠 전 에 돌아왔지만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안했다고 그랬다.
『웬일이야.유치해.공부한답시고 갑자기 눈썹까지 면도질해버린 애들도 있었잖아.그런 애들치고 제대로 학교에 들어간 애 봤니.
싫어.정말이야.』 소라가 내 짧은 머리를 보고 놀려댔다.나는 소라의 외할아버지 안부를 물었는데,그러자 희수가 놀라는 얼굴을했다. 『어쩜 너희 그럴 수가 있어.그 섬에까지 갔었단 말이지,달수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