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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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희수는 새 거처에서 통 나오지를 않았다.내가 전화라도 해보면전화벨이 두번을 울리기도 전에 받고는 하였다.얼마나 외로우면 그럴까 하고 생각했지만 희수의 말은 정반대였다.컴퓨터를 만지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지겹지도 않고 사람처럼삐 골치아프게 만드는 일도 없어서 좋다고 하였다.
나는 간혹 윤찬이를 만났다.가끔은 처음처럼 소라와 셋이 볼링을 치거나 하면서 시간을 죽이기도 하였다.여름방학 초기의 소라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로 학교 도서관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윤찬이와 내가 도서관으로 소라를 찾아가고는 하였 다.
소라는 대개 보들레르의 시나 조이스의 소설 같은 걸 펴놓고 있었는데,가끔은 자기가 쓴 시 비슷한 걸 내게만 슬쩍 보여주고는 하였다.소라는 어차피 시인이 될 여자라고 나는 생각했다.그러면 세상에 시인이면서 미인인 여자가 처음으로 등 장하는 셈일거였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윤찬은 여러가지로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희수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희수의 종적을 찾지 못해 혼자서 안달인 모양이었다.윤찬이 내게 심각하게 물었다면 나는 어쩌면 희수가 있는 곳을 불었을지도 모른다.적어 도 내가 그곳을 알고 있다는 정도는 실토했을 거였다.하지만 윤찬은내게 희수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는데,그건 아마도 윤찬의 마지막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라와 셋이서 텅빈 교정의 잔디밭에서 뒹굴고 있다가 윤찬이 문득 말했다.다시 집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는 거였다.
『더위 때문에 그런지 요즘엔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니까.
모든 걸 원점에서부터 다시 점검해봐야 겠어.그러자면 우선은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 보는게 순서일 것같더라 이거야.』 『그래 잘 생각했어.뭔가 잘 안풀릴 땐 오히려 정상적으로 가보는거야.튀지 말구 말이야.윤찬이 너 요즘에 솔직히 불안했다구.』소라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나는 비판적 지지의 입장을 취했다. 『집에 들어간다구 그게 정상적이라고는 생각 안해.상투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거야.내 말은…가출을 끝내는 건 좋은 일이지만 말이야.문제라는게 원점에서 풀어야 하는 게 아니라…현재의 상황에서 풀어가야 하는 게 아니냐 이거지.원점은 후퇴라니까.』 여름은 정말이지 무더웠고,그래서 서울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돌아버릴 지경이었다.소라와 나는 희수의 새 아지트를 방문했는데,그렇게 셋이 모이니까 왠지 나는 윤찬에게 미안한 심정이 되었다.윤찬은 집으로 들어간 다음부터 한동안 소 식이 없더니 느닷없이 지리산에서 엽서를 보내왔다.
「멍달수 보거라.여기는 지리산이야.하늘 아래 첫동네라는 산골부락 근처의 암자에 머물고 있다.한동안은 여기에 눌러 앉아 있을 작정이다.뱀이며 노루를 잡으러 뛰어다니다가 훌훌 벗어버리고골짜기의 물에 풍덩 뛰어들기도 하는데,물이 어 찌나 차가운지 버쩍 정신은 들지만 고추가 졸지에 냉동상태로 쫄아들고는 한단다. 갈보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그애와 내 관계의 열쇠는 결국 그애가 쥐고 있다는 걸 내가 알게 된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다.여차하면 머리 깎고 중이 되는 것도 고려중이다.소라에게도 안부 전해다오.희수에게는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나중에 봐.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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