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시대명음반>리처드 구드 베토벤 피아노소나타 전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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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누군가를 가리켜 천재라고 부를 때 우리는 이미 몇가지를 미뤄짐작하고 있다.어린 나이에 도달한 숙성한 해석과 높은 기교,아마도 이런 것들이 천재 음악가의 요건일 것이다.
그런 뜻에서라면 지금 소개하는 미국의 피아니스트 리처드 구드는 단적으로 천재가 아니다.오히려 51세가 되도록 미국 음악계의 은둔자로 남아 있었다.믿기지 않겠지만 미국서 가장 권위있다는 애버리 피셔賞을 진작에 받았음에도 그의 카네기 홀 데뷔는 47세를 맞던 90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왜 그랬을까.짐작컨대 구드는 천재라는 단어를 포함,얄팍한 명성과 세속의 부에 초연했던 것이다.그동안 제몫의 소리를 닦아왔을 뿐이다.
그런 구드가 올들어 발표한 회심의 레코딩,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이 온통 음악계의 화제다.베토벤 소나타라면 빌헬름 하우스나 빌헬름 켐프,알프레트 브렌델 등 독일-오스트리아 계열피아니스트가 전부인 것처럼 여겨졌던 세간의 「속 설」에 정면 배치되는 사건인 셈이다.
이 음반은「그라모폰상」 독주곡 부문 후보로 올라 최종경합을 벌이기도 했다.『미국서 불어닥친 그의 열풍은 당연한 것으로 드러났다.오늘날 리처드 구드 같은 베토벤 피아니스트는 다시 없을것이다.』영국 가디언지의 비평가는 이렇게 썼다.
『소나타 1번』1악장의 첫 상행음계부터 구드의 연주는 뭔가 심상치 않은 해석의 징조를 보인다.청정채소를 연상시키는 상쾌한입맛이 마디마디 사이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한다.가슴을 억누르는 고민에 휩싸인 베토벤의 초상은 단정한 고전주의 작곡가의 모습으로 바뀐다.그가 펼쳐보이는 가장 완벽한 승리는『함버클라비어 소나타』를 비롯, 마지막 세편의 소나타들이다.정교한 페달링으로 구축해 놓는 표현의 너비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알고보면 리처드 구드의 걸작 음반은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다.
제작을 맡은 논서치 레이블은 이 10장짜리 전집을 위해 10년을 투자했고 녹음계약 당시 이미「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라는 극존칭을 받던 구드는 흔쾌히 제의를 수락했다.부실 공사처럼 단숨에 녹음을 해치우는 음반계의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꼭10년 걸려 다시 우리앞에 나타났다.새로 「쓰여지는」 베토벤 피아노 연주사의 주역으로.
〈Nones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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