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오래된 여행가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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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김수영 金秀映(1967~) '오래된 여행가방' 중에서

스무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 방에 혼자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끔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후략).



한 인간은 한 생애 동안 하나의 여행가방을 지닌다. 길 위에서 여행가방은 점점 낡아가며 때로는 쓸모없는 욕망의 꿈들로 부푼다. 점점 누추해져가는, 점점 비릿해져가는 여행가방이 아닌, 꽃향기가 솔솔 풍겨나오는 여행가방, 구름이나 바람이 한참 머물다 가고 싶은 여행가방, 지혜와 신념과 헌신의 시간들이 묵은 때 속에 반질반질 드러나는 여행가방… 길 위에서 오래 아파하며 그 여행가방의 주인이 된 이의 영혼이여, 축복 있으라.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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