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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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세상일이란 참으로 복잡미묘한 거였다.
여학생회에서는 정 교수의 문제를 총학생회로 가지고 간 모양이었다. 아마도 총학생회에서도 정 교수의 퇴진을 주장했더라면 소라가 나서야 하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총학생회에서는 정 교수를 강력하게 내모는 일에 명 분이 약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어서 여기에 동참하기를 꺼린다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여학생회에서는 이번 사건을 성차별적 문제로 몰아갔다.
정 교수는 남성우월주의자로 특히 여학생들에게 이상하게 굴었다는걸 들고 나온 거였다.그 한 예로 얼마 전에도 강의시간에 늦은한 여학생(국문1년)에게 지각 사유를 남학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도록 강요해서 결국 버스 안에서 치한에게 시달린 걸 고백하도록 만들었다는 것까지 대자보에 밝히고 있었다.
그 대자보만 본다면 정 교수는 가학성 변태성향이 있는 아주 엉큼한 노교수처럼 보일 판이었다.
나하고 둘이 대자보를 보고 있던 소라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있었다.소라는 갑자기 잠깐 가볼 곳이 있다면서 잰걸음으로 걸어갔다.소라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여학생회 사무실로 들어섰다.혹시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쩌나 하고 나도 뒤 따라 들어섰는데,소라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이 누구신지 만나고 싶은데요.』 회의용 탁자에 둘러앉아 있던 여학생들이 일제히 소라를 쳐다보았다.그중 하나가 자리에 앉은 채로 소라에게 응수했다.
『내가 회장인데요,거기는 국문과 1학년의 윤소라 맞죠? 우리도 다 들었어요.정 교수가 강요하는 바람에 버스 안에서 성희롱당한 이야길 강의실에서 다 했었다죠… 하여간 잘 왔어요.』 『저는요,정 교수님께 시달린 일도 없구요,정 교수님이 제게 잘못한 것도 없어요.잘못한 게 있다면 강의시간에 늦은 제가 잘못이구요,더구나 그날이 만우절날이기는 했지만 치한에게 당했다고 거짓말을 한 제가 나빴지요.아시겠어요? 자기 주 장을 위해서 편한대로 남을 함부로 써먹지는 말아달라는… 전 이 말씀을 드리려구 여기 온 거예요.구체적으로는 우선 대자보에 쓴 저하고 관련된 거짓말은 당장 빼주세요.아시겠죠.』 말을 마친 소라가 몸을휘익 돌려서 여학생회 사무실을 빠져나왔다.고개 숙이고 타박타박걷는 소라에게 내가 말했다.
『대단해.이런 걸 담임선생님이 알면 너한테 감격하실 거야.』『이러지 마.나 농담할 기분이 아니라구.뭐가 뭔지 모르겠어.다들 자기 입장에서만 매사를 이용해.죽은 주 선배도 이런 거 원하지 않을 거라구.』 저쪽 도서관1층 로비 앞에서는 일단의 여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는게 보였다.가장 강하게 나오고 있는게 주미경의 동기인 국문과 3학년 여학생들이라고 했다.주미경은아마도 자기 친구들 사이에서는 꽤 괜찮은 친구였던 모양이었다.
월요일에는 사태가 수습국면으로 전환됐다.도서관 당국이,주미경은 전에도 열람 도서를 빼가다가 적발된 전력이 있다는 걸 밝히고 나선 거였다.여학생회는 「정 모 교수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선으로 물러섰지만 정 교수는 거기에 어떤 반응 도 내보이지않았다.정 교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 건 사실이었지만 수업을게을리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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