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시프린스 악몽' … 여수, 태안의 눈물 닦아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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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피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충청도 사람들이 시프린스호 사고 때 우리를 도왔으니 그 빚을 갚아야죠."

12일 오전 10시 태안군 소원면 만리포 해수욕장. 구슬땀을 흘리며 검은 기름을 걷어내는 자원봉사자의 무리에서 호남 사투리가 들려 왔다. 1995년 시프린스호 사고 때 기름 유출로 아픔을 겪었던 전남 여수 시민 80명이 아침 일찍 이곳에 도착해 보은의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시프린스 사고 때 방제 활동을 했던 전남 소방서 소속 소방관 45명도 이날 태안 앞바다에서 기름을 제거했다.

"그때 우리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어요. 이 눈물은 헌신적으로 자원봉사를 해 준 분들 덕에 멈췄지요. 우리도 태안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젖 먹던 힘까지 다할 겁니다."

여수수협 최영창(68) 조합장은 "우리가 겪었던 피해보다 더 심각해 태안 어민들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시프린스호 사고 때 진 빚 갚으러 왔어요"=검은 기름 파도가 치는 바다를 참담한 표정으로 바라본 여수 시민들은 "기름 제거는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곧바로 방제복을 입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시프린스호 사고 때 방제 작업을 해 본 노하우 때문인지 시민들은 능숙한 솜씨로 흡착포를 백사장에 뿌리고 발로 흡착포를 밟아 기름을 제거했다. 방제본부 측이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방제 작업을 벌였다.

"기름 방제 작업은 우리가 선배들이에요. 다 해봐서 잘하지요"

누군가 농담을 던지자 이들의 얼굴에 잠깐 웃음이 일었으나 곧 12년 전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에는 전문적 방제선도, 체계적인 인력도 없었다. 그래서 어민들은 생계를 포기한 채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밀려오는 기름과 고독한 싸움을 벌였다. 어민 김종곤(65)씨는 "바다에 떠다니는 기름은 떠내면 되지만 방파제나 바위에 붙은 기름을 없애려면 일일이 걸레로 닦아낼 수밖에 없어 장기전에 돌입해야 한다"며 태안 주민들에게 방제 작업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여수시는 이들의 자원봉사 외에도 앞으로 3~4차례 더 봉사활동을 벌이기로 하고 자원봉사자 모집에 나섰다.

◆"12년 전 방제 작업과 변한 게 없어요"=시프린스호 사고 때 방제 작업에 참여했던 전남 소방본부 소속 구천회(45) 계장과 오영규(41) 소방관이 이날 오전 10시부터 원북면 학암포해수욕장 바위에서 기름을 제거했다. 이들은 "상황이 이 정도로 참담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방관들이 더 놀란 것은 방제 작업이 12년 전과 변한 게 없다는 점이다.

시프린스호 사고 때도 오일펜스.흡착포.기름 처리제가 주로 사용됐으나 물량이 부족해 현장에서 방제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인력 부족도 문제였다. 시프린스호 사고는 해안에서 30㎞가량 떨어진 섬 인근에서 발생했으나 현장에 투입할 인력이 부족, 조기에 기름이 퍼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런 문제점은 12년이 지난 이번 태안 사고 때도 그대로 드러났다. 인력 부족과 허술한 지휘 체계가 시프린스 사고 때와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다.

오 소방관은 "시프린스호 때 해양경찰.소방.자치단체가 대책본부를 구성했지만 협조가 이뤄지지 않아 현장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문제가 되풀이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자치단체.해경.경찰이 책임을 떠넘기고 작업이 느려지는 것도 그때와 같았다. 구 계장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재난에 대응하는 범국가적 지휘 체계와 방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프린스호 사고=1995년 전남 광양항에서 원유를 하역하던 유조선 시프린스호가 A급 태풍 '페이'를 피하기 위해 출항했다가 전남 여수시 소리도 앞에서 좌초하면서 원유 5035t을 유출시켰던 사건. 어민들의 피해액 735억원과 방제비용 224억원 등을 합해 총 960억원의 피해가 집계됐다. 주민들은 피해보상액으로 735억원을 청구했으나 IOPC 같은 기관은 심사를 거쳐 232억원을 깎아 503억원을 지급했다.

태안=서형식.신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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