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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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멍하니 달력을 보니 대학생활이 시작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 있었다.대학생이 돼있다는 게 꿈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기실변한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그야말로 나는 그냥 나일 뿐이었다.
몹시 머리가 아팠지만 나는 두통약 같은 걸 먹지는 않았다.어지간한 통증이라면 나는 언제고 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 견뎌내고싶어했다.언젠가 아는 약사로부터 들었는데,약이라는 건 어떤 약이든 효과와 부작용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안먹을수록 좋다는 거였다.게다가 나는 어지간한 아픔이라면 직접 맞닥뜨려서 견디고 싶었다.
아픈 걸 유보시키거나 돌아가거나 하지 않고 아픈 만큼 아파해서 그 아픔이라는 걸 소진시키고 싶었다.그래야 완전하게 그 아픔을 극복하는 거라고 나는 나를 달래고는 해왔던 거였다.그래서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한 것이 아니라 두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일요일이었고 늦잠에서 깨어난 거였다. 얼마나 아플 것인가… 언제까지 통증이 계속될 것인가… 아프다는 것은 반드시 나쁜 것인가… 왜 웃으면서 아파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난밤에 술을 퍼마시고 길가에 쪼그려 앉아서 토해내던 일이 떠올랐다.아이들이 내 등을 두드려주던 생각도 났고,나중에는 다들 어디론가 가버리고 가로등 아래에 혼자 기대앉아 있던 기억도났다.나는 대학생이 됐는데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서 울었던 것일까. 그래 새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하늘을 난다--는데,나는 아무 껍질도 깨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나는 날고 싶은데 나는…. 『말해봐 임마.왜 그러는 거야.』 내가 술 마신 걸 토해내며 엉엉 우니까 악동들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그랬다.그럴 때면 이유가 없이도 울음이 북받치는 법이었다.
『하영이 때문에 그러는 거니.글쎄 걘 너밖에 없다니까.』 하기야 하영이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는 것도 열받을 만한 일이기는했다.세상에 공부라는 게 뭔지,하영이가 일류대학에 다닌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내 기를 죽인 것도 사실이었다.그렇다고 하영이지가 전화 한번 안하는 건 정말이지 웃기는 잘난 척이었다.인종차별이나 남녀차별은 안되고 공부차별은 해도 되는 게 이 세상이었다. 내가 고개를 좌우로 열심히 저어댔던 모양이었다.
『그럼 써니 때문에…? 멍달수 얘 알아줘야 돼.왕순정이야,왕순정.』 써니라는 이름이 나오니까 정말이지 갑자기 더 슬펐다.
고3이 되기 직전에,나는 고3이 되기 때문에 써니를 마음에서지워야 한다고 생각했었다.공부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써니에게더이상 매달려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달수 너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거냐?』 형 생각을 하니까 더 울고 싶었다.그 썰렁한 여자 때문에 손가락까지 잘라버리고 군대로 도망친 형이 불쌍했다.그 여자는 형이 군대에 갔기 때문에,내가 고3이 되면서 이제는 써니를 잊어야 한다고 그랬던 것처럼 형을 지우려고 들었다.그 여자나 나나 하영이나 다들 비겁한 인간들이었다.
악동들은 우리집 근처의 가로등에 나를 기대서게 해놓고 사라졌다. 나는 노래했다.갈테면 가라지 푸르른 내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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