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모금은 李 前총재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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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위기론에 직면한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극약 처방을 꺼내 들었다. 崔대표는 17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불법 대선자금 모금 사건에 대한 '이회창 전 총재 책임론'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崔대표는 "한나라당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대선 불법자금 모금에서 비롯됐다"면서 "그 중심에는 당시 대선 후보였던 李전총재가 있다"고 말했다. 崔대표의 극약 처방에 당 안팎이 술렁이고 있다.

◇'이회창 책임론' 왜 꺼냈나=당초 崔대표의 기조연설문 초안은 훨씬 강경했다.

"李전총재가 이제 불법 대선자금의 족쇄에서 당을 해방시켜 줘야 한다. 책임을 지고 스스로 감옥에 가겠다고 밝혔는데 지금이 그 시기라고 생각한다" "2002년 대선 당시 선대위에서 일한 사람들도 스스로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는 문구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이날 오전 연설문을 미리 검토하기 위해 열린 상임운영위원회의가 발칵 뒤집혔다. 참석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당내 분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신중론을 제기했다. 한 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기조연설문은 표현이 완화됐다. 자극적인 문구가 모두 빠졌다. 하지만 崔대표는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인 李전총재 책임론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崔대표는 "李전총재가 대선자금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으며 감옥에 가더라도 본인이 가겠다고 했다"며 "그럼에도 한나라당이 대선자금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 깊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고 해 李전총재의 결단을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崔대표가 李전총재 책임론을 이 시점에서 들고 나온 이유는 뭘까. 측근들은 이를 한마디로 '최병렬식 총선 올인'이라고 표현했다.

한 측근은 "차떼기 발언에서 비롯된 한나라당의 위기상황은 백약이 무효할 정도"라며 "이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총선을 치르기 어렵다는 게 대표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윤여준 의원은 "李전총재와의 절연이 아니라 과거 부패정치와의 절연"이라고 했다.

토론회에서 崔대표는 이런 심정을 그대로 토로했다.

그는 "지금 한나라당이 처한 문제와 관련해 당 대표의 리더십 부족도 있지만 제일 덩치가 큰 문제는 불법 대선자금"이라며 "국민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과 나라의 미래 등을 아무리 얘기하려 해도 이 벽에 막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했다. 崔대표는 "그러다 보니 이런 결연한 마음이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돼 이해받는 여건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호소했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다급하면 그런 문제를 제가 언급하겠느냐"고도 했다.

당 지지율 저하 속에 소장파의 퇴진 압력이 가중되면서 崔대표는 수습책 마련을 위해 당 밖의 인사들을 폭넓게 접촉해 왔다.

이 과정에서 '차떼기'로 상징되는 불법 대선자금 문제를 李전총재와의 단절 카드로 돌파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됐다고 한다.

◇"총선 내 책임하에 치른다"=자신의 거취 문제에 대한 崔대표의 답변은 분명했다.

그는 "이번 총선은 제 책임하에 치르라는 게 23만 대표 경선 선거인단의 명령"이라며 "대표직을 어쩌고 하는 얘기는 당치않다"고 못박았다. 총선 불출마 역시 거부했다.

崔대표는 "계보가 없는 내가 불출마하면 무슨 힘으로 당을 지휘하고 총선전략을 끌고 가겠느냐"며 "이벤트화가 정치의 본령은 아니다"고 말했다.

대신 崔대표는 서울 강남갑에서 출마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는 "전국구 말번도 좋다"면서 "공천심사위에서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崔대표는 위기 수습책 중 각론으로 ▶당사 매각과 연수원 공탁▶중앙당 대표실 폐쇄 후 국회 대표실로 입주▶조기 선대위 발족 등을 언급했다. 다만 그는 당 일각에서 제기되는 '이문열 중앙선대위원장 카드'에 대해 "지금 이 자리에서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崔대표는 이날 나름대로 마련한 당 위기 수습책을 내놓았다. 문제는 이게 먹히느냐다.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당장 소장파가 요구해 온 2선 후퇴론을 그는 거부했다.

연설문 초안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으로 대표되듯이 李전총재 책임론에 대한 당내 반응도 싸늘하다. 오히려 내분의 불씨를 키웠다는 주장마저 꿈틀대고 있다. 崔대표의 숙제는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다.

박승희 기자<pmaster@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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