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아의 말하기 칼럼] 침묵이라는 아름다운 언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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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27면

인디언 부족 라코타는 말의 앞과 뒤에 오는 침묵을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들의 삶을 관찰한 바 있는 오글라라 시욱스 부족의 추장 ‘서 있는 곰’은 이렇게 썼다.

“대화는 결코 즉시 시작되지 않았고 서두르는 법도 없었다. 아무리 중요한 사안이라도 아무도 질문을 해대지 않았고 답변이 강요되지도 않았다. 생각을 위한 고요는 진정으로 예의 바른 대화의 시작이었다. 라코타족에게 침묵은 의미 가득한 것이었으며, 말 이전의 ‘침묵의 공간(a space of silence)’에 대한 기다림은 말하는 자에 대한 존중과 정중함의 표현이었다.”

세상은 와글와글 떠드는 자들의 손에 들어와 있다. 모두들 리더십을 이야기하고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한 말하기와 읽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모두들 리더가 되고 나면 대체 누가 남아 ‘따르는 자(follower)’가 되려나 생각해 본다.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데 시간을 보내면서도 듣기를 제대로 하기 위한 훈련은 덜 받는 편이다. 듣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떻게 듣는 것인지 제대로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말하기는 리더십이고 듣기는 팔로어십(followership)이며, 말하기는 적극적인 활동이고 듣기는 수동적인 활동이라는 전형적 분류에 얽매여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제대로 듣기란 메시지의 의도된 의미들을 창조적으로 찾아내는 대단히 역동적인 활동이다.

제대로 듣지 못하는 자,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자신이 준비한 말들만 머릿속에 가득
한 연사는 청중의 요구를 센스 있게 파악해 스피치의 물꼬를 바꿔 갈 수 없다. 국민의 말을 듣지 못하는 리더는 제대로 된 정책을 만들 수 없다.

예전 기업에선 경영학 석사 출신을 우대했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제대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을 뽑았고, 요즘은 제대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을 뽑는다고 한다. 제대로 들을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의 경우, 같은 회의석상에서 같은 말을 듣고서도 돌아가서 하는 일들이 제각각이라고 한다.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 틀림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란 사실 제대로 된 리더가 기본으로 갖추어야 할 미덕이 아니겠는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느 날 백악관을 찾아온 한 군사전문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가 떠난 뒤 비서에게 너무나 기분 좋은 어조로 “그 사람 참 말 잘하는 사람이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 전문가가 한 것이라곤, 조용히 루스벨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가끔씩 “그렇군요” “아, 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라고 응수한 것뿐이었다.

말 앞의 침묵은 말하는 자의 생각을 위한 시간이고, 말 뒤의 침묵은 듣는 자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다. 때로 말 중간의 침묵은 유창한 말보다 더 청중을 환기한다. 하던 말을 멈추고 똑딱똑딱 2초만 침묵해 보라. 모든 시선이 집중될 것이다.

음악을 음악이게 하는 것은 그 사이사이의 침묵이다. 소리를 소리이게 하는 침묵은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여백과 같다. 침묵과 듣기라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두 활동은 실은 그림의 여백과 같은 필수적 요소다. 말하기는 듣기의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 듣기를 포함한 폭넓은 개념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수많은 말이 난무하는 시대, 말을 하는 것이 권력인 이 시대에 라코타족의 침묵을 되새기며 인디언식 이름으로 ‘입 다물고 멀리 보는 나무’라는 이름 하나쯤 갖고 싶다. 진정한 팔로어로 남고 싶다.

유정아씨는 현재 KBS 1FM ‘FM가정음악’을 진행하며, 서울대학교에서 말하기를 강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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