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건조한 ‘게임의 법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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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18면

권순관(사진가)

웬만해선 타기 싫은 지하철이지만 그보다 더 싫은 것이 반복되는 도심의 교통정체이기에 출근시간이나 빠듯한 약속시간을 맞추겠다는 이유로 종종 지하철을 타곤 한다. 지하철을 타는 일은 도심의 지하를 이동하는 공간경험이겠으나 시간적인 이유나 목적이 더 앞서는 셈이다.

지하철 다시 보기 <10·끝>

사실 바쁘지 않으면 좀처럼 지하철을 타지 않는데, 지하철만큼 지루하고 무미건조한 곳이 또 없기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도심의 풍경이 없어 심심하다는 말은 오히려 고전에 속한다. 우연히 마주하게 되는 낯선 타인의 얼굴이 못내 어색해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한 자신만의 시선의 대상을 만드는 일이 더 골칫거리다. 시간적인 이유로 지하철을 탔지만 그 부산물처럼 얻어진 시간의 소진으로 불안해하는 것이다.

권순관(사진가)

속도·시간 논리 강요하는 지하철 공간
어디 이뿐인가. 최단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지하철 공간의 주요 미덕인지라, 발 빠른 사람들의 경우 목적지 해당노선의 환승 지점에 가장 가까운 열차 칸을 미리 계산해 열차 안에서까지 움직인다. 요즘에는 인터넷이나 휴대전화의 내비게이터가 이를 대신해주어 발품을 가능한 한 줄일 수 있도록 기술적인 도움마저 주고 있다.

느슨하고 여유 있고 한가로운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촌각을 다투며 바쁘게 살고 있는 도심 속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고 어색하게 비춰지는 일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사람들이 지하철 공간에 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지하철 공간이 만들어 놓은 일정한 논리와 체계 속에 빠지기 일쑤이다. 이를테면 속도와 시간의 논리를 강요하는 잘 짜인 공간의 체계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권순관(사진가)

이런 흐름을 거스르면 안 되기 때문에 보행거리를 줄이고자 직진해야 하고, 앞사람의 뒤만 보고 잰걸음을 걸어야 하며, 많은 사람의 무리 속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군집 보행을 해야 한다. 온몸의 감각으로 걷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단축하는 일이 최우선인지라 만보객은 고사하고 무리를 지어 달리는 경보선수처럼 자신을 변신시켜야 지하철 공간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법칙’을 그나마 준수하게 되는 것이다.

지하철의 숨겨진 체계 들추어내기
권순관의 사진은 바로 이런 지하철 공간의 논리, 숨겨진 체계의 구조를 들추어낸다. 고속버스 터미널이라는 표지판 이외에는 지하철이라는 어떠한 단서도 없지만(‘플랫폼’이라는 제목이 이를 대신한다) 분명 이 사진은 지하철 플랫폼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지하철을 기다리는 나와 이웃의 모습이고, 이미 거기 존재했던 사람들을 실제로 찍은 것이다.

‘스트레이트 포토’(직접적 사진)의 방식을 취하지 않고 ‘메이킹 포토’(연출 사진)의 방식을 취했던 것은 이 사진들이 플랫폼에 서 있는 사람들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하철 공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구조나 그런 공간의 구조 속에서 사람들이 관계 맺는 방식을 드러내려 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풍경을 지워냈기 때문에 지하철 공간에서 서로 다른 낯선 타인들이 일시적으로 맺게 되는 어떤 간극이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만남과 이별의 플랫폼, 기다림의 정거장 같은 오래된 수사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현재화된 지하철 공간의 차갑고 건조한 논리 같은 것들 말이다.

예컨대 지하철 공간은 수학처럼 a와 b가 다르고 서로 소통할 수 없는 공간이며, ‘네 줄 서기’와 같은 지하철 캠페인처럼 질서를 강요하는 공간이며, 가능한 한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기 위한 속도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공간인 것이다. “빨리빨리”를 외쳐야 하는 현대인에게 어울리는 이만한 공간이 또 어디 있을까를 되묻게 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실 급속한 산업화로 대변되는 근대화, 근대적 도시공간화의 논리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효율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근대화의 공간 말이다.

틈새 시간 관리해주는 각종 장치들
과장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공간의 논리 속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거대한 체계를 효율적으로 지탱케 하는 단자처럼 배치되어 버린다. 옆에 줄 선 사람이거나 건너편 플랫폼을 바라보다 우연하게 마주하게 된 사람들을 바라보곤 하지만, 보이긴 하지만 닫혀 있는 창처럼 서로를 향해 열려 있지 않기에 서로의 무표정한 익명성을 그저 확인해야 할 뿐인 그런 관계들을 만들어 낸다.

시간 때문에 지하철을 타야 하는 현대인에게 사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하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것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사치이고 과잉일지 모르겠다. 선남선녀를 바라보고 싶은 특정한 욕망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오히려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보다는 지하철 경영난의 호구책으로 무분별하게 많아지고 있는 상업광고 이미지들뿐인데, 이조차도 시각공해라 치부되기 좋을 정도로 여기저기 반복되어 볼썽사나움이거나 식상함일 뿐이다.

결국 이미 익숙해진 줄서기의 경험을 통해 그 시간의 기다림이 잉여된 시간임을 깨닫고, 그런 벌어진 틈새의 시간들을 관리하는 기술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무가지 신문이나 게임기, DMB 수신기, 휴대전화의 갖가지 기능에 집착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간을 때우게 하는 이런 장치들은 현대인에게 목적지의 위치가 찍혀 있는 지도 그 이상일 것이다.

거대한 회도로의 한 점이 된 인간
그렇게 우리는 플랫폼에서 특정한 공간을 경험한다기보다는 속도와 시간의 효율성을 위해 그 공간을 생략하고 잊어버리고, 옆 사람과 앞 사람과의 일정한 간극을 유지하도록 강제당한다. 그 정해진 질서의 간극만큼이나 타인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관심을 가지는 것조차 어색하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는 요령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보여지는(display) 관계로 배치된다.

이렇게 권순관의 사진은 지하철의 어떤 물리적인 공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미시적인 행위마저 규칙성과 질서를 통해 구조화시키는 어떤 틀, 지하철로 대변되는 현대의 시공간의 일정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지하철 공간이 수행하는 효율적인 기능, 곧 빠른 이동을 위해 사람들을 일정한 질서의 논리로 재배치하는 공간 자체를 디스플레이하고 있는 셈이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더 이상 우리는 만남과 이별을 노래하지 않는다. 기다림이나 머무름이 아닌 또 다른 이동을 위해 마치 거대한 회로도에 놓인 한 점처럼 그저 시간만을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바쁜지라.


민병직씨는 여러 전시공간에서 큐레이터로 일했고 현재 서울시 도시갤러리 추진단의 책임큐레이터이며, 권순관씨는 사진과 매체미술을 전공하고 5·18 기념재단 제작지원 작가로 선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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