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을 포착하는 사진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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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20면

부산 최초의 사진 미술관이 해운대에 문을 열었다. 고은문화재단이 설립한 고은사진미술관은 지방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전시회를 기획할 뿐만 아니라 사진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인쇄와 출판 및 세미나 등의 교육 사업도 지원하며 폭넓은 활동을 벌이겠다는 계획이다. 서울에 치우쳐 있는 문화·예술 인프라의 균형을 회복하겠다는 것. 고은사진미술관은 이미 명성을 얻은 국내외 사진작가들의 전시와 더불어 창의적으로 순수하고 미래지향적인 신진작가들도 발굴해 전시회를 개최할 생각이다.

사진 예술 지원과 더불어 지역민과의 활발한 소통도 꿈꾸고 있는 고은사진미술관은 개관을 기념하는 전시로 ‘구본창 사진전’을 택했다. 고은사진미술관 관장인 이재구 경성대학교 사진학과 교수는 “그의 작품들은 언뜻 보면 닳고 낡아서 힘없이 갈라져 버린 사소한 형상들이지만, 사진 속에는 새것으로의 과거와 당당한 현재, 그리고 소멸될 미래가 서로 소통함으로써 사진의 본질인 시간성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말로 그 취지를 설명했다.

구본창 작가는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전통을 지켜왔던 1980년대 한국 사진계에 충격을 주었던 인물. 작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거나 타인의 내면으로 다가가는 그는 재봉틀로 박아 이은 인화지에 인체를 담은 연작 ‘태초에(In The Beginning)’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진평론가 김승곤씨는 저서 『구본창』에서 구본창의 사진을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허구처럼 보이지만,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상력이나 감성·기억, 갖가지 상념이야말로 어떤 현실보다 리얼한, 살아 있는 것이다”고 평했다.

이번 전시회는 구본창 작가가 7만㎞에 달하는 여행을 하며 전 세계 박물관에 놓여 있는 백자들을 찍어 화제를 모았던 ‘백자(vessel)’ 시리즈를 비롯해 ‘바다(ocean)’ 연작과 신작인 ‘오브제(object)’ 시리즈 등으로 구성돼 있다.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닳아 숱한 주름으로 갈라진 비누들을 찍은 ‘비누(soap)’는 사소한 물건에 시간의 무게를 담아 시선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작품.

백자를 찍어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듯한 느낌을 전하는 ‘문 라이징’은 일반 인화지가 아닌 수채화지에 인화돼 또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사진 심리학자 신수진씨는 “구본창의 사진은 어느 날 문득 날아든 전령과도 같이 우리에게 시간을 일깨우는 것이다”라는 말로 쉬우나 쉽지 않은 그 사진의 느낌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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