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영권 둘러싼 철없는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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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주총 시즌을 앞두고 기업지배구조와 이를 둘러싼 지분 경쟁이 화제다. 기업지배구조에 대해 가장 강력한 규율은 경영권 시장을 통해 이뤄진다. 특히 자본시장 개방으로 주요 대기업의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나드는 상황이다 보니 기업들이 해외 기관투자가들에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나 경영권을 둘러싸고 최근 곳곳에서 곤혹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의 이론보다 현실은 훨씬 복잡해 법률의 얼개는 겨우 갖추어져 있지만 구체적인 판단에 들어가면 충분한 준비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KCC와 현대의 분쟁, 그리고 SK㈜와 소버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KCC의 경우 사모펀드를 이용한 지분 매집에 있어 보유목적 공시의무의 위반이 문제가 됐다. 그런데 이에 대해 외국자본에 비해 국내자본이 역차별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소버린에는 특혜를 주고 있다는 논리다. 주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건대 어느 쪽도 할 말은 있을 것 같다.

몇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우선 소버린이 주장하는 '수익창출과 위험분산' 목적에 경영진 개편을 위한 지분 매입이 합당한지는 결국 판단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소버린의 SK㈜ 지분 취득시의 사전 신고의무 위반에 대해 검찰이 '고의성이 없다''외국기업의 경미한 잘못에 강하게 처벌하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로 기소유예처분을 했던 것은 심란하기 그지없다. 적어도 자산규모 50조원의 국가 기간산업을 둘러싼 첨예한 경영권 분쟁에 쓰일 논거는 아니다. 적용되는 법이 달라서라면 그 법들 사이의 상이한 기준도 문제다.

소버린의 엄격한 윤리적 입장은 신선한 자극이기는 하다. 그러나 소버린의 몇 개의 과거 사례를 보거나 국내에서의 세련된 홍보를 더한 치밀한 주주제안, 의결권 제한 회피를 위한 지분 분산 등을 보면 '국내법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착오로 보이지는 않는다.

출자총액제한의 취지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기업만을 규제하는 제도라는 것이 문제다. 외국의 투자펀드가 곳곳의 조세회피지역에 아지트를 두고 돈을 모아-혹은 빌려서-몇 바퀴만 서로 돌리면 재벌의 순환출자의 몇 배 효과가 있지만, 그 자본의 실체와 운영은 '세계정부의 감독 당국'이 있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이것이 '초국적 자본의 금융기법'의 실체다. 우리 기업들은 뻔히 알아도 법에 묶여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내 대기업의 의결권만 묶는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더구나 외국자본이 들어오면 '투명경영'까지 도입된다는 일각의 철없는 소리까지 듣다 보면 어이가 없다. 경영권 분쟁의 사례가 많은 미국의 경우 경영권 다툼이 벌어지면 의사결정의 재량은 훨씬 제약적으로 해석되고 동시에 투자자의 시장공시의 경우도 훨씬 엄격한 절차를 따르도록 하는 제도적 기준이 자세하게 마련돼 있다. 우리는 어떤가. 지배구조개선의 딱지만 갖다 붙이면 '경영권 다툼'이 아니라 '윤리적 기업개혁'이 되어 찬양을 받아도 되는지 의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럴 듯한 제도들을 베껴오긴 했지만 막상 그 제도들을 우리 현실에 맞게 구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반이 아직 마련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집중투표제는 정말로 이상적인 제도인가. 연기금의 적극적 의결권 행사를 얘기하지만 이들의 의사결정 구조는 과연 충분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가. 이런 것들이 바로 신임 경제부총리가 말한 '한가로운 학습'과 '아마추어의 시행착오'다.

경제개혁은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면서 제도의 틀을 세우는 어려운 작업이다. 제도가 우리의 현실과 역사성에 비추어 타당한지 살피고, 구체적 운영을 위해서는 공유할 수 있는 판단의 기준을 마련해야 할 때다.

물론 기업 역시 책임과 투명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일부의 후안무치한 해먹기식 경영 때문에 철없는 이들의 실험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박찬희 중앙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