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와 ‘그라벨로’의 운명적 만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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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 29면

이탈리아 토종 포도 갈리오포로 만든 ‘그라벨로(Gravello)’.

한국음식과 와인의 마리아주를 테마로 한 ‘신의 물방울 한국편’을 만들자는 생각은 올해 초 우리 남매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움트기 시작했다. ‘신의 물방울’ 팬들을 만나는 것이 목적인 이 여행에서 우리는 다양한 한국음식을 맛보았다.

삼계탕·보쌈·떡볶이·지짐이·불고기 등등. 이들 음식은 하나같이 일본인의 입맛에 맞으면서도 일본음식에는 없는 진함과 강렬함이 살아 있다. 우리는 갖가지 요리를 먹으면서 한국음식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한데 여러 음식을 접하면서 느낀 점은 한국음식에 절대 빠지지 않는 매운 국물과 반찬인 김치는 ‘와인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치의 매운 맛은 입 안에 오래 남아 와인의 섬세한 과일 맛과 복잡함을 깨끗이 지워버린다. 더구나 이상하게도 김치를 먹은 뒤에 와인을 마시면 김치 맛이 한층 맵게 느껴진다.

‘어렵지만 김치와 맞는 와인을 찾아내면 한국편이 훨씬 재미있어지겠다’고 생각한 우리는 난제(難題)에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한국편 작업에 들어갔다. 비록 목적인 와인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어떻게든 잘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하며 불완전한 출발을 한 것이다.

그러나 안이한 생각이었다. ‘자극에 자극을 매치한다’는 발상으로 백포도주는 샴페인으로 가기로 했지만, 김치에 어울리는 적포도주는 좀처럼 나타나 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흑후추 같은 스파이스한 맛이 나는 시라 품종의 와인과 맞춰 보려 했으나 흑후추와 고추는 매운 맛의 질이 달랐다. 부르고뉴와 보르도도 전멸. “이번에는 적포도주를 빼고 샴페인 하나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거의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차에 이탈리아로 출장을 간 이탈리아 와인 마니아 ‘혼마 조스케’, 즉 혼마 아쓰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쪽은 낮, 이쪽은 밤. 마침 ‘신의 물방울’ 한국편 원고를 쓰고 있을 때였다.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김치와 어울리는 와인을 찾았어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당시 그가 있던 곳은 칼라브리아라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이 지방 사람들은 토종 포도 ‘갈리오포’와 함께 고추도 재배한다고 한다. 즉 그들은 고추 요리를 먹으면서 갈리오포 품종으로 만든 와인을 마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운 음식에 어울릴 수밖에요.” 수화기 너머로 혼마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혼마가 귀국하기를 기다려 그가 가져온 갈리오포로 만든 와인 ‘그라벨로’를 김치와 함께 시음해봤다. 한마디로 놀라웠다. 운명의 만남이라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환상적인 궁합. 그라벨로는 고추의 뉘앙스가 또렷하면서 김치의 강렬한 개성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이처럼 김치와 조화를 이루는 적포도주는 원고 마감을 코앞에 둔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찾아낼 수 있었다. ‘혼마 조스케’에게 감사한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세계는 넓고 어떤 요리나 그 요리에 어울리는 와인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 점을 ‘한국편’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번역 설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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