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投機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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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땅투기.환투기 등 무엇이든 '투기(投機)'라고 하면 부정적인 뜻이 앞선다. 하지만 투기는 원래 불교 용어다. '스승과 수행자의 마음이 합치하는 것' '수행자가 진리를 크게 깨닫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종교적 구도와 관련해 매우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왜 시장을 어지럽히는 위험한 돈놀이로 변질됐는지는 불분명하다. 불교적 투기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무쌍함이 속세의 투기꾼들이 머리 굴리는 모습과 겹쳐져 전혀 다른 뜻으로 바뀌지 않았나 짐작할 따름이다.

이에 비해 '투자(投資)'는 장기적이고 유익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투자는 장려하고 투기는 때려잡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다.

그렇다면 투자와 투기를 무 자르듯 구별하는 것이 가능할까. 일반적으로 장기적이면 투자, 단기적이면 투기로 본다. 짧은 시간 안에 폭리를 취하면 악의적인 투기, 오랜 기간에 걸쳐 거액을 벌면 성공한 투자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자금 운용의 길고 짧음은 목표 수익을 올리는 데 걸린 시간에 불과하다. 애초의 의도가 투자였느냐, 투기였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투기 목적으로 땅을 사뒀으나 값이 오르지 않아 오래 지니고 있었다면 이를 투자로 봐줘야 할까.

또 투자도 넘치면 과잉투자가 되고 이것이 상황에 따라선 투기로 분류되기도 한다. 1999년 정보기술(IT) 경기가 끓어오를 땐 투자였던 것이 거품이 꺼지자 투기로 비난받았다.

명확한 구분이 서지 않자 '남이 하면 투기, 내가 하면 투자'라는 억지도 나오는 판이다. 엄정한 기준 없이 막연한 흑백론이 자리잡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취임 회견에서 "투기꾼이나 무책임한 시장 참가자들은 방치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 "외환시장에서의 투기적 움직임도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실험실에서라면 리트머스 시험지로 산성과 알칼리성을 간단히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훨씬 복잡하다. 정부의 의도와 시장의 움직임이 합치하는 것은 불교의 투기만큼이나 어려워 보인다. 이를 노련한 李부총리가 모를 리 없다. 그가 투자와 투기를 어떻게 가려낼지 궁금하다.

남윤호 정책기획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