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으며생각하며>4.강원춘성군 서울여인숙 주인 朴姸愛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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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강원도춘성군(江原道春城郡)사명산(四明山)은 자신의 뿌리를 소양강(昭陽江)물속으로 내리고,소양강은 자신의 근원을 사명산 골짜기로부터 얻어 출발하는 그곳에 가랫골(楸谷里)약물샘은 있다.
사명(四明)은 일월성신(日月星辰)네가지 천체에서 오는 빛의 밝음이다.사명이 관통하는 꼭대기를 가진 산이 사명산이다.소양(昭陽)은 십간(十干)의 끝인 계(癸)의 별칭이다.양기(陽氣)가 비로소 싹이 트려하매 만물이 삶을 머금음(陽氣始萌 萬物含生:양기시맹 만물함생)을 일러 소양이라 한 다고 했다.이런 내가 춘천(春川)이고 이런 강이 소양강이다.이런 강의 근원이 강원(江原)즉 강원도(江原道)다.이 상징성 넘치는 지명들이 지니는 모순과 조화의 우연찮은 한데 모임은 눈을 감고 오래 생각할만한 거리다.이런 지명들이 모이 는 실체인 가랫골로부터 나는 쓸쓸히준괘(屯卦)를 연상한다.준(屯)은 땅속에서 겨우 싹트기 시작하는 식물의 모양을 상형(象形)한 글자다.역경(易經)은 이 괘를음양(陰陽)이 비로소 교접하매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어려움(始交難生‥시 교난생)이라고 풀었다.시교난생은 다름 아니라 시맹함생(始萌含生)하려는 昭陽의 어려움이겠다.
가랫골 약물샘은 그야말로 보잘것 없이 작은 샘이다.한 바가지물을 겨우 떠내기조차 어려울 만큼 작다.그러나 이 작은 물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한번 더 자신의 건강을 가꾸어 내려고생명 밭의 흙을 갈아 엎는데 쓰려는 농기구인 가래 그것이다.그들은 마음의 병 때문에 절망하거나 몸의 병 때문에 절망한 사람들이다.수술을 포기했거나 이미 수술을 받은 암 환자,재활에 들어간 고혈압 증후군 환자,당뇨병 환자들이 특히 많다.이들은 이곳을 소문에 따라 찾아와 여인숙 한군데를 골라 방을 정하고 가랫골 사람이 되고 만다.
서울서 사람들의 운명을 보아주는 한편으로 관심있는 지식인들을모아 정통명리학(正統命理學)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역문관(易門關)주인은 이곳의 장기 투숙객은 아니지만 빈도높은 방문 요양객 자격으로서 역시 가랫골 사람이다.그는 6.25 전상(戰傷)으로불구가 된뒤 아직도 수시로 쑤셔오는 자신의 몸의 고통을 이곳에와서 가라앉힌다.왜 그는 하필 이곳에 와야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그는 역설적이게도 가랫골을 소천옥(小天獄)이라는 별난 이름을 붙여 부른다.골짜기가 너무 깊어 하늘은 조그맣고 병든 몸과 마음들이 재생의 시련을 겪고 있는 곳이기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약물샘으로 이르는 골짜기를 따라 깎아지른 절벽을 겨우 기대어여남은 여인숙들이 서 있다.보은(報恩)할머니가 경영하는「서울 여인 숙」도 그 가운데 한 집이다.여행 호기심 때문에 이곳을 찾는 손님은 하루저녁 이상 묵는 일이 썩 드물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하룻밤 방값은 1만5천원,한끼 밥값은 4천원,비싸지 않다.그러나「소천옥」의 가슴을 누르는 답답함은 하룻밤 자 고난 이튿날 아침은 더욱 절실해져 달랑 짐을 챙기게 만든다.그러나 이상한 일이 생긴다.만일 버스를 놓치거나 보은 할머니가 해주는아침 밥맛에 반해 점심 한끼만 더 먹고 떠나는 것이 낫겠다며 한나절 눌러 앉는 날에는 새록 새록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 소천옥이 주는 편안함에 편입되기 십상이다.그리고 자신이 마음의 병자임을 깨달아 가게된다.오후가 되면 서울 방향 경춘도로가 다스릴 길 없이 막힌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터다.그 핑계로 오늘하루 잠자리 불편을 참고 내 일 새벽에 떠나리라고 작정하는 순간 그는 가랫골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그 다음부터는 마음에무슨 괴로움만 일면 소천옥 가랫골을 찾아가고픈 유혹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보은 할머니 박연애(朴姸愛)씨는 자기 이름을 소개하면서「연애」라는 이름이 아직도 쑥스러운지『고울 연字,사랑 애字예요.우리증조부가 지어준 이름이래요』라고 말한다.65세 경오(庚午)生.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보은 속리산 산골이었는데 노 년은 강원도 사명산 산골에서 보내고 있다.
『남편은 일찍 저 세상으로 떠나 보냈고,처음엔 6.25때 부산 피난시절 젖 모자라는 아기의 유모로 들어갔다가 나중엔 그 집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되었지요.』朴씨가 서울 여인숙을 산 것은 쉰살 나던 해였던 지금부터 15년 전이다.30년 동안을 그집 일을 하다보니 가정부라기 보다는 주인집 식구가 되어버리더라고 한다.그댁 부인이 신경쇠약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 가랫골로 휴양차 왔을 때 따라왔다가 그동안 모은 돈과 빚을 좀 내어 이 여인숙을 샀던 것이다.벽에 걸린 사진틀 속의 중년 신사를 가리키며,『얘가 내 젖을 먹고 큰 그 댁 아입니다.지금은 대학에서 철학교수가 되어 가르치고 있지요.요새도 가끔 날 보러여기 와서 며칠 쉬다 가기도 하지요.얘 엄마는 나한테는 친언니나 다름없습니다.내가 서울 나가서 만나기도 하고 그 분이 여기로 오기도 하고.』 이 여인숙에는 객실이 1호에서 10호까지 열개가 있다.주인인 보은 할머니방에서 대담을 하고 있는 도중 투숙객들이 하나 둘씩 건너와서 이야기를 거든다.겉보기로는 모두건강해 보인다.그 가운데 어떤 부인이 보은할머니를 제치고 말한다. 『반포 낚시회의 張총무라는 당시 스물다섯살 밖에 안 난 젊은이가 위암에 걸렸어요.병원에서 수술을 하려고 배를 열었더니말기암이더래요.다른데 모두 전이까지 되어 있었구요.수술을 하려다 말고 다시 덮은 다음 의사선생이 그 아버지더러 말하기를 두달을 넘기기 어려워 보이니 환자가 하고싶어 하는 대로 해주라고했다는 거예요.그 낚시회는 낚시하러 여기 소양호에도 오곤 했는데 이 가랫골을 그래서 잘 알고 있었대요.아들을 이 보은 할머니한테 맡겨 놓은지 일년 좀 넘었을 때 두달 밖에는 더 못살겠다던 그 젊은이가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돌아왔더랍니다.병원에 다시 가서 정밀검사를 했더니 위장뿐만 아니라 몸 어디에도 암세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대요.』 ***손님도 종업원일 보은할머니가 나머지를 좀 보충한다.
『張총무 그 젊은이 그 뒤에 장가들어 아들도 낳고 지금 잘 살아요.가끔 여기도 놀러 오고.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 와서 병이 낫고 안좋아하는 사람은 병이 안 나읍디다.그 사람은 여기 와서 장작도 잘 패고 시장 심부름도 잘 댕기 고 나물도 잘 뜯어 왔어요.』 이곳의 장기 투숙객들은 마치 자기가 묵고 있는 여인숙의 종업원처럼 일을 거든다.소규모 원시공동체 생활로돌아간듯이 말이다.이런 질서를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보은 할머니다.이 집에서 나이가 40대를 밑도는 사람이면 모두 보은 할머니의 수양아들이고 수양 딸이다.보은 할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그 가운데서도 가장 신통한 사람은 보은 할머니의 막내친자식인 송장호씨다.그는 올해 서른여섯살 난 건축업자다.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다.그는 토요일이면 어머 니를 거들어 드리려고 서울을 떠나 이곳으로 내려온다.재미있는 것은 장호씨보다 단 몇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투숙객이면 그를 아무 존칭도 붙이지 않고『장호야!』하고 부른다는 점이다.그러면 밤중이라도 그는『예,예』하며 달려온다.
보은할머니 朴씨가 가장 보람있게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 일찍 여의고 남의 집살이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컸으나 삼남매가 하나같이 착하고 효성스럽다는 사실이다.
『李씨라는,영등포에서 경찰로 있던 사람이 간암에 걸려 우리집에 와 삼년 넘게 지냈어요.몸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는가 싶었는데,하루는 강에 나가서 큰 고무다라이(일본어:물통)에도 안들어 갈만큼 큰 잉어를 낚아 왔습니다.본인도 그랬 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젊은이 하나도 이렇게 큰 잉어는 영물이기 때문에 방생(放生)해 줘야 한다고 말했어요.그러나 그 잉어를 꼭 먹어야겠다는 사람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李씨가 그것을 할 수 없이잡았지요.그 날부터 李씨는 갑자기 코 에서 피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병원에 가보아야겠다며 이곳을 떠났지요.그 사람이 그때 하숙값 밀린 것이 60만원 있었어요.내가 그 돈 말을 꺼내지도않았더랬는데 돈이 쪼들려 당장은 못 내지만 치료를 받고 약을 사서 돌아올 때는 그 돈 을 갚겠다고 말하고는 떠났습니다.그 뒤로는 몇달 소식이 끊어졌어요.그러던 어느날 그 李씨의 조카라는 사람이 그 60만원을 들고 여기를 왔습디다.그날이 자기 삼촌 초상치르고 삼우날이라는 거였어요.유언하기를 나한테 가서 그돈을 꼭 갚 아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그 돈을 못받겠습디다.
***유언빚 돌려보내 끝까지 안받고 돌려보냈지요.그 자리에 올해 마흔살 난 우리 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조카라는 사람이 돌아간 다음 말하기를 엄마가 요새 우리집 사정 딱한 것만 생각하고 그 돈 눈 딱감고 받아버릴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역시 우리 엄마는 최고야 하면서 나를 덥석 안았습니다.우리는 李씨 생각 때문에 모자가 그렇게 껴안고 오래오래 울었습니다.』 역문관 주인은 보은할머니의 사주(四柱)가 관성살지(官星殺地)라서 남편 복은 지지리도 없고 식상회국입묘(食傷會局入墓)라서 젖없는 애기의 젖애미 노릇,남의 병든 서방들 더운 밥 시중들기로 먹고살 팔자지만 자가용 안사도 걸어 다니지는 않을 만큼인덕(人德)을 타고 난데다가 무엇보다 인품 하나는 관대하기 짝이 없게 타고 났다고 한다.그는 동네 사람들이 캐어 오는 산나물.약초는 절대로 값을 깎는 법도 없고 안사고 돌려 보내는 일도 없다고 그의 당뇨병 환자 수양딸 미 스 朴이 나한테 일러준다.이 집 투숙객들은 따로 가욋돈을 내지 않고 이 산나물 반찬과 약초들을 얻어 먹는다.
『그래서 엄마는 돈 모으기는 영 틀린 사람이에요』라고 내게 말하면서 이 장기 투숙 환자 수양딸은 저것은 가랫골 사람의 웃음이다 싶은 웃음을 씩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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