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영화] 엘리자베스, 막강한 여왕 & 불행한 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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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셰카르 카푸르
출연:케이트 블란쳇·클라이브 오웬
장르:드라마
등급:12세

  블록버스터형 사극이다. 영국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의 활약상을 성대한 화면에 옮겨 놓았다. 영화 막판, 위기에 몰린 영국함대와 스페인 무적함대의 대격돌이 볼 만하다.

 불에 휩싸인 스페인 전함, 배에서 떨어져 바다를 헤엄치는 말,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십자가 등등, 영화의 본 내용과 큰 관계없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무장한 인간의 확신이 얼마나 무모하고, 나아가 헛된 것인지를 일깨운다. 21세기의 지구촌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종교전쟁을 비웃는 듯한 느낌이다.

 ‘골든에이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일대기다. 그간 숱하게 영화·드라마로 재연됐던 얘기다.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영국인의 변함없는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평생 ‘처녀 여왕’으로 살며, 종교·산업·문화 등 영국의 각종 제도를 정비했던 엘리자베스의 치세를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골든에이지’는 특히 엘리자베스의 강점과 약점에 방점을 찍는다. 남자의 진정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불행한’ 여인으로서의 엘리자베스와 강대국 스페인에 맞서 풍전등화의 조국 영국을 지켜낸 ‘막강군주’로서의 엘리자베스를 중첩시킨다. 대작영화·대중영화로서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출생·성장과정 등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케이트 블란쳇의 열연도 기억할 만하다. 같은 소재를 다룬 ‘엘리자베스’(1998년)에 이어 또 다시 엘리자베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를 소화했다.

 영화에는 대형사극의 모든 요소가 고루 들어 있다. 엘리자베스와 해적 출신의 모험가 라일리(클라이브 오웬)의 사랑,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신교를 국교로 정한 영국의 대치, 영국 왕실 내부의 권력 쟁탈전 등등. 여기에 모든 국민을 편하게 하려는, 즉 ‘좋은 정치’를 실현하려는 엘리자베스의 리더십이 끼어든다.

 하지만 ‘골든에이지’는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간 모양새다. 특히 비운의 여인이었던 엘리자베스의 ‘러브 라인’이 약하다. 엘리자베스와 라일리,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총애했던 하녀의 ‘3각 멜로’로 분위기를 끌어가려 하지만 그들간 사랑의 동기와 갈등이 매우 상식적이고 평면적이다. 잔잔한 연민이 끼어들 자리가 적은 편이다.

 또 당대의 궁전·의상·문화를 꼼꼼하게 보여 주려는 의도는 좋았으나 화려한 화면을 뒷받침하는 디테일이 부족해 소리만 큰 ‘웅변’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영국인에게는 과거의 영화(榮華)를 기억하는 즐거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개인과 역사가 정치하게 맞물리는 화면을 기대하는 우리에겐 빈 구석이 많은 영화로 남을 것 같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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