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갈루치와 강석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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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길고 긴 북핵(北核)협상이 마침내 타결됨으로써 협상의 두 주역인 강석주(姜錫柱)북한외교부 副부장과 로버트 갈루치 美핵대사가 앞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할 기회는 별로 없을 것 같다.지난해 6월부터 대좌를 시작한 두 수석대표는 회담이 지루한 반전을거듭하면서 미운정 고운정도 참 많이 들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인상착의에서 말투.성격.협상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면에서 매우 대조적이다.1백70㎝정도의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진 姜대표는 회담장에서 씨름꾼으로 통한 반면 1백80㎝가 넘는키에 늘씬한 체구를 가진 갈루치대표는 학자의 풍모를 물씬 풍겼다. 姜대표는 가끔씩 반주(飯酒)를 걸친듯 불그스레한 얼굴로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이렇게 오래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식의 반말에 가까운 어투로 투박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게 보통이어서「동네이발소 아저씨」같은 정감어린 인상을 갖게 했다.
올해 48세의 갈루치대표는 대학교수출신 관료라는 경력이 말해주듯 세련된 언어와 행동으로 부자집 외동아들을 연상케 했다.그러나 갈루치대표는 기자들의 질문에 미사여구를 섞어 화려하게 대답하지만 내용을 간추려보면 정작 알맹이는 없는게 보통이었다.
회담전망에 대해서도 姜대표는 항상『낙관적』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편이었지만 갈루치대표는 타결 발표 직전까지도『낙관과 비관이란 표현을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조심스런 성격이었다.회담장에서는 그래서 씨름용어를 빌려 姜대표는 들배지 기가,갈루치대표는 호미걸이가 각각 주특기라는 농담섞인 비유로 두 사람의 협상태도를 설명하곤 했다.
국력으로 따지면 북한은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는 파트너가 아니었다.
미국도 너무 딱딱하면 부러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姜대표는 결렬위기까지 몰고갔다 반전을 일으키는 벼랑끝 전략을 구사했고 갈루치대표는 막무가내로 나오는 북한을 유연하게 되받아 넘기면서 두 사람은 묘한 조화를 이루어 회담을 타결로 이끌었다.
타결과 결렬의 극한점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극적 반전을 연출한 북-미회담은 외교협상의 전형을 예시한 한편의 드라마였다.
주연으로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두 수석대표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제네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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