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호의실전당구>이상천,쉬운공 놓쳐 크루망에 패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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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쉬운 공일수록 집중하라」-.
지구촌 최고의 승부사인 이상천(40.재미교포)마저 쉬운 공을놓쳐 큰 승부를 잃은 적이 있다.
지난 87년 당구 유학차 미국에 갓 도착한 이상천은 미국의 내로라 하는「고수」들에게 연전연승,마침내 세계 3쿠션의 1인자인 크루망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지난 63년 프랑스 니스에서 개최된 제18회 세계당구선수권대회 우승 이후 30년간 70여회의 세계타이틀을 휩쓴 「황제」레이몽 크루망(60.벨기에)이 보기에 당시의 이상천은 문자 그대로 풋내기였다.
그러나 풋내기의 배짱이 가상해서였을까.크루망은 이상천의 도전을 선선히 받아들여 마침내 미국 당구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기의 결전이 이뤄지게 됐다.대결의 조건은 5일간 3쿠션 4백개 먼저 치기.
나흘째 시소를 벌이던 경기는 마지막날 오후 크루망 3백90점,이상천 3백84점의 스코어로 막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누가먼저 몰아치기(속칭「한큐」)를 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날 판.마침내 이상천에게 도표와 같은 쉬운 공이 왔다 .다음 구를 만들어 서너개까지 몰아칠 수 있는 쉬운 걸어치기 시스템.
그러나 세계 챔피언과 대등한 경기를 펼치고 있다는 데서 오는흥분과 긴장으로 인해 이상천은 이것을 빠뜨리고 말았다.크루망이누구인가.백발이 성성한 이 노 챔피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10개를 몰아치면서 5일간에 걸친 대접전을 마무 리했다.이 경기에서 크루망에게「한 수」배운 이상천은 결국 7년후인 지난 1월세계선수권자에 등극했고 누구보다도 먼저 크루망과 포옹했다.
『찬스 뒤에 위기가 온다』『쉬운공을 놓치지 말라』『호랑이는 토끼 한마리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크루망이 이상천에게 남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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