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미니 ‘왕팬’이었는데 같은 역 더블캐스팅 감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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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가 시작된다. 이 공연의 주인공 라다메스역에 백전 노장 테너 주세페 자코미니(67)와 더블 캐스팅된 사람은 한국의 이정원(38)씨. 총 다섯 번의 공연중 세 번 출연하는 이씨의 소감은 남달랐다.

“1988년 자코미니가 올림픽 개막 축하 공연차 왔을 때 리허설 무대를 훔쳐볼 정도로 팬이었는데, 그와 같은 역을 하는 날도 오네요.”

이씨는 한국인 테너 중 최근 인기가 가장 급상승한 성악가다. 지난 6월 세계 오페라의 중심지인 라 스칼라 극장 오디션을 통과하면서 그의 이름은 국내 오페라 팬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성악가들이 ‘꿈의 무대’라 부르는 이곳에 그는 조수미(소프라노)·홍혜경(소프라노)·김동규(바리톤)·전승현(베이스)에 이어 한국인 성악가로는 5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대학 졸업(1995년) 후 2년 동안 합창단 생활을 하며 모은 돈으로 이탈리아 유학을 떠났다. 유학 생활 4년 만에 처음 따낸 배역이 투란도트의 ‘칼라프’.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에서 경력을 시작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대에 서며 내공을 쌓아갔다.

“처음 유학을 떠날 땐 꼭 외국을 나갔다와야 인정받는 풍토에 불만이 있었죠. 하지만 외국 무대에 설수록 노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고, 목소리 또한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푸치니의 ‘투란도트’만 52번, 베르디의 ‘아이다’는 19번 해보았다는 그에게도 라 스칼라의 오디션 무대는 적잖은 부담이었다. “2년전에도 봤었는데 떨어졌거든요. 이번엔 좋은 에이전시를 만났고 큰 힘이 됐어요.”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중 ‘오 천사와 같은 너’를 불러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내년 4월 라 스칼라에서 공연하는 ‘맥베드’의 주역을 따냈다. “총 6회 공연 중 2번을 제가 불러요. 저는 ‘초짜’니까 지금은 이 정도밖에 더 주겠어요.”

‘꿈의 무대’를 앞두고 요즘 그의 행보는 바쁘다. 이달 초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에서 그는 힘이 있으면서도 억지스럽지 않은 목소리를 선보여 “자연스럽고 로맨틱한 목소리”라는 평을 받았다. 그는 “공연을 본 한 관객이 ‘가요 듣는 것처럼 자연스러웠어요’라고 말해 주었을 때 감회가 새로웠다”라고 털어놓았다. 이번 ‘아이다’에서는 “꽤 익숙한 배역이지만 새로운 감정을 불어넣어 저만의 라다메스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이제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대의 막이 내려오는 순간부터다. “라 스칼라에서 무대를 더 줄지가 관심사죠. 공연을 끝내면서부터가 진짜 시작이에요. 이탈리아 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에도 진출해 보고 싶습니다.”

글·사진=김호정 기자

◆라 스칼라=1778년 문을 연 라 스칼라 극장은 루치아노 파바로티, 마리아 칼라스 등 최고의 성악가들이 거쳐간 곳이다. 베르디·푸치니의 여러 작품들이 초연되는 등 오페라의 역사를 이끈 극장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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