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제작한 초대형 태권브이, 폐기처분될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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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실물로 재탄생한 태권브이가 하늘 한번 날아보지 못하고 오랜동안 창고에 갇힌 끝에 산산조각나 버려질 운명에 처했다.

2001년 1월 한 정부 산하기관이 태권브이 2기를 제작했다. 김청기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태권브이를 국가기관이 제작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상상력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이런 임무를 부여받고 탄생한 태권브이가 폐기될 위기에 처한 것은 악당 로봇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저작권자의 요구 때문이다.

국립극장이 보유한 높이 6m와 3.3m짜리 태권브이 2기는 2002년 어린이를 위한 극장 체험 프로그램으로 탄생됐다. 높이 6m짜리 태권브이는 헬리콥터에 매달려 대극장의 무대 아래에서 서서히 솟구치며 위용을 드러냈다. 태권브이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에선 “우와” 탄성이 터져 나왔고 아이들은 열광했다. 태권브이는 국립극장을 찾은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뒤이어 3.3m짜리 태권브이는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 천장 위에서 내려오면서 무대로 등장했다.

대극장에 실물로 등장한 태권브이는 태권브이 모형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너비는 3.6m에 달한다. 2001년 겨울 국립극장 구재하 책임 미술감독의 지휘 아래 공연제작부 소속 직원 전원이 꼬박 한 달간 매달린 끝에 탄생했다. 스티로폼과 특수 마감재로 만들었다. 전기장치를 달아 머리와 어깨 부분에 불이 들어온다.

하지만 더 이상 무대에 오를 수도, 야외로 나가 시민들과 만날 수도 없다. 지난해 저작권을 확보한 업체가 나타나 사용금지를 요청한 뒤부터다. 지금은 2기 모두 저작권에 묶여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 왼쪽의 컴컴한 무대장치 대기실에 갇혀 있다.

태권브이 관련 저작권은 영화제작사 신씨네 관계회사인 ㈜로보트 태권브이가 갖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해 태권브이의 저작권과 상표권을 획득했다. 이 회사의 허락 없이는 극장 대기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국립극장 규정에 따르면 소품은 일정기간 보관 후 폐기된다. 저작권자의 허락이 없는 한 태권브이는 더 이상 햇빛 한번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현재 대형 태권브이 모형은 국내에 모두 4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하나는 서울 예장동에 위치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출입문 왼쪽에 설치돼 있고, 나머지 하나는 ㈜로보트 태권브이가 만든 것이다. 이 가운데 야외에 설치돼 빛을 보고 있는 것은 2005년 주문 제작된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보유 태권브이 뿐이다. 하지만 철제 모형인데다 바닥에 고정시켜 놓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저작권 보유 업체가 만든 것도 현재 경기도 남양주 소재 한 임대 창고에 보관돼 있다. 몸집은 국립극장 것이 가장 크다. 나머지 두 모형은 높이가 각각 3.5m다.

태권브이는 지난해 5월 어린이날을 맞아 국립극장 앞마당에서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마지막 외출이었다. 저작권을 가진 업체 관계자가 국립극장을 찾아와 10쪽이 넘는 저작권 관련 계약서류를 보여주면서 사용금지와 폐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로보트 태권브이 측은 이 모형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고 규격에도 맞지 않아 태권브이의 상품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입장이다.

국립극장도 난처한 입장이다. 저작권을 가진 업체가 등장하기 전에 만들었고 교육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저작권 업체가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립극장 관계자는 “국가예산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저작권자의 동의만 있다면 비상업적인 목적으로 활용하고 싶지만 그렇게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동 전시가 가능한 3기 가운데 2기는 저작권 때문에 대중 앞에 공개할 수 없고, 저작권자인 ㈜로보트 태권브이가 제작한 것은 올해 초 서울시청과 서울역 앞 등지에서 전시된 다음 현재 활용처가 마땅치 않다는 이유로 창고에서 잠자는 중이다. ㈜로보트 태권브이 권준형 이사는 “회사에서 제작한 태권브이를 회사 건물 앞에 전시하려고 했지만 구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 창고에 갖다 놨다”고 말했다. 권 이사는 “국립극장이 만든 모형은 우리가 정한 규격과 맞지 않아 사용금지와 폐기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1976년에 태어나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태권브이는 지난 1월 애니메이션 영화로 재탄생돼 반짝 조명을 받은 뒤 다시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올해는 태권브이 탄생 31주년이 되는 해다. 최근 국립극장을 찾았다 우연히 태권브이를 본 이상현(33·경남 마산시 신포동)씨는 “처음 본 순간 규모에 놀랐다”면서 “좋은 취지로 만들었는데 저작권의 잣대에 묶여 창고에서 방치되는 것을 보니 안타깝다”고 말했다. 태권브이 동호회 김지환(35) 회장은 “양측 간에 좋은 방향으로 합의가 도출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용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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