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칼럼

이회창, 출마 잘했다는 역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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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이회창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명박이 국민들의 신뢰를 못 얻고, 그의 대북 정책이 위험하다는 이유를 들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가 더 솔직했다면 그의 출마의 변은 이랬을 것이다. 첫째, 경선에서 이긴 이명박 캠프는 기고만장하여 박근혜 진영을 홀대하고 내년 총선거의 공천권까지 독식하려 한다. 분열 위기의 한나라당을 비집고 내가 출마하여 박근혜의 지지를 얻어 내면 승산이 있다. 둘째, BBK 문제가 심상치 않다. 김경준 증언이 이명박을 낙마시킬 파괴력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이명박이 낙마하면 내가 정권 교체의 중심이 될 수 있다.

경선에 패한 박근혜는 백의종군의 자세로 이명박을 돕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높은 지지율에 도취된 이명박은 박근혜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9월 7일 경선 후 처음으로 박근혜를 만났을 때도 진정으로 들리는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다. 이명박의 측근들은 박근혜와 그의 사람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쏟아 냈다. 이명박 캠프의 박근혜 푸대접은 이회창에게는 출마에의 초대장이었다.

박근혜의 말대로 이회창의 출마는 정치의 정도(正道)가 아니다. 이인제의 말대로 한나라당 경선이 끝난 뒤 출마를 선언한 이회창은 1997년 경선에 불복하고 출마한 이인제 자신의 아류다. 97년 대선 때 이회창은 92년의 정계은퇴 선언을 뒤집고 출마한 김대중과, 한나라당의 경선에 불복하고 출마한 이인제를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그들의 전철을 밟고 있다. 이회창은 스스로 각오한 대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보수표의 분산으로 정권 교체가 불발로 끝나면 그는 여생을 미운 오리새끼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전에는 뒷면도 있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회창의 출마는 역설적으로 두 가지 긍정할 부분이 있다. 하나는 이명박으로 하여금 몸을 낮추고 박근혜 측의 지원을 받아 한나라당의 분열을 막고 정권 교체를 이루는 효과다. 이명박이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여유 있게 낙승하는 것보다는 긴장 속의 접전 끝에 신승하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집단적인 매너를 위해 바람직하다. 경선에 이기고 저토록 오만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 대선에 이길 경우 얼마나 독선과 독주로 흐를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회창 측이 말하는 스페어 후보의 역할이다. 이명박은 BBK에 문제 없다고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불안하다. 이명박과 범여권 단일후보의 양자 대결에서 이명박이 BBK로 낙마라도 한다면….

게리 쿠퍼 주연의 명화 ‘하이눈’이 생각난다. 1870년 미국 서부의 작은 마을 헤이드리빌. 정오의 기차 편으로 무법자 프랭크 밀러가 보안관 윌 케인에게 복수하러 온다. 그는 5년 전 케인이 체포하여 감옥에 보낸 악당이다. 케인은 밀러와 맞서는 데 동조할 사람을 찾아 동분서주하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다. 마을 집집마다의 시계가 정오를 향해 쉴새 없이 재깍거림에 따라 마을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한다. 지난 며칠 김경준을 기다리는 이 나라의 대선 정국이 그 팽팽한 긴장감에서 헤이드리빌 마을을 방불케 했다. 김경준이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안 탔다로 긴장과 이완이 교차됐다. 김경준은 프랭크 밀러가 아니라 피의자로 송환되어 오지만 그의 증언이 큰 것 한방인가 헛방인가가 우리의 신경줄을 팽팽하게 끌어당겼다. 이런 하이눈적 상황에서 이명박 지지자들이 이회창 출마를 마냥 비판만 할 일일까.

이명박은 이회창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회창 없는 대선에서 이명박이 당선될 경우 한나라당은 분열되고 이명박과 그의 참모들의 오만은 통제 불능일 것이다. 이회창은 이명박에게 패자 앞에 몸을 낮추도록 가르쳤다. 이회창은 출마선언에서 자신의 출마로 보수표가 분산되어 정권 교체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사퇴할 뜻을 밝혔다. 정치인의 약속 따위 믿고 싶지 않지만 그런 사태가 오면 생애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한 공약을 지켜 그의 대선 출마가 대의를 위한 것이었음을 증명하기 바란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