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전쟁' 2라운드 맞붙은 영국-러시아

중앙일보

입력

'007의 나라' 영국과 'KGB(소련 시절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의 나라' 러시아가 스파이 사건을 놓고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다.

제대한 영국 군인이 러시아 정보기관을 위해 군사 기밀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체포됐기 때문이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12일자에서 "기갑부대 출신의 제대 군인 피터 힐(사진)이 군사기밀 서류를 러시아에 넘기려다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올해 23세인 힐은 그동안 스파이 혐의로 경찰의 감시를 받아오다 7일 저녁 리즈에서 비밀문서를 넘겨주려다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가 넘기려한 군사 기밀은 영국 정부기관으로부터 빼낸 민감한 군사정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정부는 빠르면 12일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 사건은 지난해 영국에서 숨진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KGB의 후신)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의 독살 사건에 이어 또다시 영·러 양국 외교관계를 악화시키는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리트비넨코는 1998년 모스크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FSB 상부로부터 재벌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영국 망명중)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폭로했다가 FSB 추적을 받고 2000년 런던으로 도망친 인물이다.

리트비넨코는 영국으로 망명해 러시아 정부를 비판해 오던중 작년 11월1일 루고보이 등 전직 FSB 동료 2명과 런던의 한 호텔 바에서 만나 차를 마신 뒤 집으로 돌아온 직후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같은 달 23일 사망한 그는 방사능 물질인 '폴로늄210'에 중독된 것으로 밝혀졌고 영국은 루고보이를 암살 용의자로 지목, 영국 법정에 세우겠다며 러시아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영국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냉전 이래 러시아와 영국 간 최악의 외교 관계를 초래하면서 리트비넨코의 독살 사건을 둘러싼 진실 게임이 사건 발생 1년이 다 돼가도록 여전히 안갯속을 헤매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영국은 자국내 러시아 스파이들의 활동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영국의 국내정보기관 MI5는 현재 주영 러시아 대사관에서 비밀리에 스파이활동을 벌이는 사람만 30명이나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영국의 군사 기밀 외에 정치나 산업분야 등에서 다양한 비밀을 빼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영국 국방부는 3주 전 각 부대에 보낸 통지문에서 "현재 러시아 정보기관들의 활동이 냉전시대 때만큼이나 광범위하게 확장돼 있다"고 경고했다. 스파이 세계에선 냉전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셈이다.

박경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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