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행복지수 높이기] 5 . 애들을 믿고 키워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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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애 키우는 일이 맘대로 된다고 생각했으면 잔소리를 했겠지요. 맘대로 안 되는 걸 인정하니 믿고 맡길 수밖에요."

연년생 남매 근영(20).태진(19)이를 키우고 있는 전북 남원의 송민선(51).이옥희(46)씨 부부는 "부모의 역할은 편안한 울타리가 돼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태진이네 집은 자식농사 잘 짓기로 동네에서 유명하다. 전북대 시각디자인학과 1학년인 누나 근영이에 이어 태진이도 올 대입 정시모집에서 전북대 지리학과에 합격했다. 물론 아이 잘 키웠다는 근거가 대입성적만은 아니다.

아버지 송씨의 직업은 건설 일용직이다. 대전에서 사업을 하던 송씨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이던 1993년 부도를 내고 빚에 쫓겨 남원으로 내려왔다. 붕어빵 장사 등 노점상을 해 번 돈으로 식당도 차려봤지만 그나마 모았던 돈만 까먹고 1년이 못 돼 접었다. 아이들 학원비는커녕 학교 수업료도 밀리기 일쑤였다.

근영이가 고3 때 1년 동안 미술학원에 다닌 것이 이들 남매가 받은 사교육의 전부다. 그나마 부모가 학원에 보낼 엄두를 내지 못할 때 그 길을 개척한 것은 근영이 자신이었다.

"근영이가 학원을 찾아가 청소 할 테니 수강료를 절반으로 깎아달라고 부탁했다네요."어머니 이씨는 쑥스러운 듯 설명했다. 근영이는 1학년 과정을 마치며 과 수석을 해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니게 됐다.

동생 태진이는 지난해 말 '태진이의 좌충우돌 자전거여행'(예담刊)이란 여행서적을 냈다. 고2 여름방학 때 24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남원에서 강릉~통일전망대를 거쳐 천안~고창~해남~광양~부산~무주 등의 코스로 전국을 일주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예산 3만원으로 출발한 여행이었다. 끼니를 건빵으로 때우며 시골 교회와 기차역.원두막 등에서 잠을 자면서도 "비에 젖은 건빵을 먹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호기를 부리는 별난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을 낸 과정도 근영이와 마찬가지로 '자수성가형'이다. 여행하면서 수첩에 빼곡히 적은 일기를 기초로 원고지 1천여장 분량의 글을 엮어 10개 출판사로 보냈다. 학연.지연.인맥 등의 연고는 물론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유명출판사를 골라 원고를 보냈고, 그중 예담 쪽에서 연락이 와 책이 만들어졌다. 책 속에 들어간 삽화는 근영이가 그렸다.

동년배들이 보충수업이다 자율학습이다 하며 정신 없었을 고2 여름방학을 여행으로 보내도, 여행 후 한 학기 동안 매일 새벽까지 원고를 쓰는 데 매달려도 송씨부부는 아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공부 안 하고 뭐하는 짓이냐""그런 건 대학 가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등 '평범한' 부모라면 했을 법한 잔소리도 일절 없었다.

"아유, 말도 마세요. 중학생 때 제가 새벽 서너시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는데도 한 번도 잔소리를 안 하신 분들인데요." 태진이가 투정처럼 자랑을 했다. 태진이는 "'아무도 날 안 막으니 나라도 제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 게임시간을 조절하게 됐다"고 말했다.

송씨는 "매사에 집착하며 안달하지 말자는 것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얻은 교훈"이라며 "아이들에게 집착해 욕심을 부리고 잔소리를 해댄다고 얼마나 달라지겠느냐"고 말한다.

잔소리 대신 잔정을 느낄 수 있는 일은 기꺼이 한다. 이씨가 외출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남겨놓고 가는 편지와 매주 일요일 아이들과 함께 가는 목욕탕 등으로 소박한 재미를 즐긴다.

잔소리와 함께 송씨 부부가 아이들 앞에서 절대 하지 않은 일이 또 있다.

"빚쟁이들이 대문을 두드리는 힘든 상황에서도 엄마.아빠는 한번도 안 싸우셨어요." 태진이는 "그래서 우리 집은 돈이 없어도 참 행복한 집이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결혼 생활 20여년 동안 어떻게 한번도 갈등이 없었을까.

"싸울 일이 왜 없겠습니까. 집에서 안 싸우는 거지요. 싸울 때는 둘이 집을 나와 차를 타고 멀리 가서 싸웁니다. 요즘은 지리산으로 가서 싸우지요." 아이들에게 불안한 분위기를 전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송씨 부부의 설명이다.

"아이들에게 욕심 없습니다. 자기들 하고 싶은 일 하고 만족하면 그만이지요." 담담한 송씨 부부의 말에 자녀에 대한 '욕심'과 '사랑'이 동의어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남원=이지영 기자<jylee@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yks23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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