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7. 부모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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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결혼 56주년을 맞은 필자의 어머니와 아버지.

우리 집에는 항상 손님이 북적댔다. 가깝고 먼 친척들이 우리 집에서 며칠밤이나 몇 달, 심지어 몇 년을 묵어가는 일이 잦았다. 어머니(이영애·1900~92)가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동물을 기르는 일도 좋아했다. 우리 집에는 항상 개가 여러 마리 있었고 오리까지 기른 적이 있다. 한시도 가만히 계시는 것을 싫어해 조그마한 텃밭이라도 있으면 배추와 무를 심고 가꿨다.

어머니는 조용한 아버지와 정반대로 친구도 많고 활달하신 분이었다. 아버지는 “너의 어머니는 이제 제주도 뱃사공이 점심을 잘 먹었는지 알아보러 나갈 것”이라고 말해 우리 남매가 배를 잡고 웃은 적도 있다. 외가 쪽은 힘이 좋은 장사 집안이었다. 나의 외삼촌은 실제로 씨름 장사 대회에 나가서 상도 타왔다. 몸이 튼튼한 가문에서 태어난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대대로 남자 아이가 잘 태어나지 않았던 황씨 집안에 전주 이씨이고 몸이 튼튼한 어머니를 일부러 데려왔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결혼 후 누나를 낳고 16년 동안 아들 소식이 없어 애를 태우시던 어머니는 나를 임신한 뒤 ‘이번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이 집을 나가겠다’고 비장한(?) 결심까지 했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크게 눈치를 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딸을 낳으면 산천을 떠돌며 혼자 지내려 했다”고 자신의 마음을 나에게 들려주시곤 했다. 어머니는 그만큼 강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반면 아버지는 정신력이 강했지만 몸은 약했다. 결혼 후 자전거를 배워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한두 차례 비틀거리며 타기를 시도하다가 결국 포기했을 정도였다. 또 편도선이 약하고 감기에 자주 걸려 한의원의 단골 손님이었다. 당시에는 특별한 수술이라는 것이 없었고 젓가락을 불에 달군 다음 목에 직접 대고 지지는 방법이 자주 시행됐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입을 벌리고 한의사 앞에 앉았는데 도와드리려는 외삼촌에게 “필요없다”고 소리치며 내쳤다고 한다. 그 수술 광경을 지켜보다 현기증이 나 기절한 건 장사로 소문났던 우리 외삼촌이었다. 그만큼 독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나의 우등상장보다 개근상을 더 반기셨다. 자식들에게 몸이 튼튼해야 한다고 각별히 강조하고 밥을 많이 먹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체했을 경우 “체한 것은 많이 먹으면 뚫린다”고 하셨고, 설사가 나면 “밥을 많이 먹어야 막힌다”고 하셨다. 밥이 보약이라는 생각이 거의 신앙 수준이었다.

이렇게 대조되는 두 분은 내가 가야금을 한다고 했을 때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네가 정 하고 싶으면 해라. 네 인생은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다만 장성한 다음에 후회는 하지 말도록 하라는 훈계는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이같이 냉철한 편이어서 자식들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를 하는 법이 없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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