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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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장석주(1955~)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전문

항아리 물에 얇은 살얼음이 끼는 입동(立冬)
아침에 집 밖에 내놓은 벤자민 화분 두 개가
저녁에 나가 보니 행방이 묘연하다
누군가 병색 짙은 벤자민을 쏟아놓고 화분만 쏙 빼 가져간 것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이다
아직도 간장을 달여 먹다니!
그렇게 제 생을 달이고 있는 자도
한둘쯤은 있을 터

검정 고양이가 아직 불 켜지지 않는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다수(多數)의 저녁이
침울하게 지나간다.



해 저무는 시각, 간장 달이는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 간장 달이는 냄새가 마당을 채우고 골목길을 채우고 골목 밖 신작로 길을 다 채울 것 같은 시각, 누군가 절뚝이며 마을길을 걸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뼈 위에 걸친 입성은 다 낡았으나 안광은 혁혁한 그가 마을의 집들과 돌각담을 스칠 듯 걸어 들판으로 가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린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의 모습이 두려워 대문 뒤에 숨고…. 수십년이 지난 뒤 비로소 안다. 아, 그가 제 생을 달이는 중이었구나….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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