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현장으로 들어간 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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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넥타이 부대를 찾아간 문학의 현장. 이진명 시인의 ‘여행’이란 시를 시인과 배우 최일화(맨 왼쪽)씨가 낭독하고 있다. 앉아있는 이는 왼쪽부터 도종환 시인. [사진=김형수 기자]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여기까지 온 것이다.”(도종환의 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

  시인의 낭독과 함께 무용수들의 몸놀림이 시작됐다. 책 속에서 잠자던 시가 한 가닥 춤사위로 무대 위를 날았다. 시와 춤이 어우러진 공연이 벌어진 현장은 다름 아닌 대기업 사옥의 복판이다.

  6일 오후 7시 서울 양재동 현대·기아 자동차그룹 사옥 2층 아트홀. 임직원과 일반 관객이 700석 규모의 공연장을 빼곡히 메운 가운데 문학나눔콘서트 ‘문학, 자동차와 통(通)하다’가 열렸다. 모처럼 동료·가족과 함께한 넥타이 부대들은 퇴근 후의 노곤함도 잊은 채 하나같이 달뜬 표정이었다.

  문학 텍스트를 음악이나 춤으로 녹여낸 형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업 현장에서 열리는 본격 문학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현대자동차 사회문화팀 이영복 팀장은 “정신 예술을 대표하는 문학을 가까이 접함으로써 사원들에게 창조적 에너지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며 “이번 행사는 즐거운 직장 분위기 만들기의 일환”이라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행사에 앞서 현대·기아차 그룹은 사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그 결과 ‘가장 만나고 싶은 작가’로 소설가 김훈이 뽑혔다. 또 ‘현대·기아 브랜드와 가장 어울리는 시’로 도종환 시인의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과 이진명 시인의 ‘여행’이 각각 선정됐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설문 조사로 선정된 세 명의 작가와 독자들이 마음을 소통하는 ‘작가와의 만남’이었다. 작가들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객석에선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시인들의 작품 낭독에 춤·소리·인형극이 더해졌다. 소리꾼 정마리씨가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를 가야금과 거문고 연주에 맞춰 소리로 풀어냈다.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황정연(29)씨는 “좋아하던 작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작품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이 새삼 다시 살아나는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문학나눔사업추진위원회 홍보팀장 김근씨는 “일터에서 벌어진 문학콘서트를 통해 일상생활의 경계를 허물고 문학이 그 속에 녹아 들기를 기대한다” 며 “기업 현장을 찾아가는 문학 행사를 늘려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에스더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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