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중앙서울마라톤] 엄마와 딸 "내 딸 백혈병 완치 메달 땄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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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을 이겨 낸 김현주(右)양이 어머니 기은정씨와 함께 10㎞ 결승점을 나란히 통과한 뒤 완주 메달을 목에 걸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김태성 기자]

"그렇게 혼자 빨리 달리면 엄마는 어떻게 하니."

"날아갈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막 달렸어."

기은정(44)씨는 지난해 초만 해도 딸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2㎞ 지점까지도 "힘들어 못 뛰겠다"던 딸 현주(16.서울 대영고 1년)는 결승점인 잠실종합운동장이 보이자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달리기로 단련이 돼 있는 기씨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기씨 모녀는 10㎞를 1시간15분대에 완주했다. 손을 꼭 잡고 결승점을 통과한 뒤 완주 메달을 목에 건 현주를 보며 엄마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2003년 7월, 기씨는 만날 "피곤하다"며 잠만 자는 초등학교 6년생 현주를 보며 '사춘기가 일찍 온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하루는 현주가 학교에 가다 "너무 아파서 힘들다"며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감기인 줄 알았다. 약을 먹어도 좀처럼 낫지 않아 종합병원을 찾았고,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기씨는 의사를 붙잡고 "치료를 받아도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데 지장이 없느냐"부터 물었다. 의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일단 치료를 해서 살게 되면 그런 생각은 나중에 해 보자"고 했다.

첫 3개월 무균실 집중치료 기간에 현주는 수차례 생사를 넘나들었다. 44㎏이었던 몸무게가 34㎏까지 빠졌다. 아프기 전까지 하도 많이 뛰어 놀아 새까맣게 탄 얼굴 때문에 '탄 감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현주의 얼굴은 핏빛 하나 없는 백지장이 됐다. 걷기는커녕 서 있지도 못했다. 의사는 몇 번이나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정도다.

기씨는 다른 가족을 팽개치고 현주에게 매달렸다. 하늘은 기씨의 정성을 외면하지 않았다. 치료 2년 반 만인 2006년 1월 병원으로부터 '치료 종결'을 통보받았다. 지금은 두 달마다 검사만 받는다.

항암 치료제에 포함됐던 스테로이드 때문에 살이 좀 붙었던 현주의 요즘 최대 고민은 '날씬해 지는 것'이다. 1999년 제1회 중앙서울마라톤 때 하프부문에 출전했던 기씨는 "다이어트에는 달리기가 최고"라고 현주를 구슬렸다.

막상 출전을 결심하자 현주는 도전의 의미를 다른 데 뒀다. 힘겨운 투병 생활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 목격했던 현주는 백혈병 환우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중도 포기는 애초부터 생각도 안 했다.

"치료를 받을 때는 정말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런데 치료가 끝나고 다시 건강해지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지요. 지금은 아팠던 기억이 추억이 됐어요."

기씨는 이런 현주의 의젓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슴이 짠하다. 현주를 지켜보던 기씨는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현주야, 두 번 태어난 넌 내게 두 배의 기쁨이야."

장혜수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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