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무산 땐 국제 미아 망신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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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있을 국회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비준 동의안 처리 시도는 벌써 이번이 세번째다. 앞서 두번은 모두 농촌 의원들의 물리력을 동원한 저지로 무산됐다. 이 때문에 당시 국가적 위신과 경쟁력 손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농촌당' 의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에도 '결사 저지'를 공언하고 있다.

한 경제부처 공무원은 "세계무역기구(WTO) 1백46개 회원국 중 단 한건의 FTA도 체결하지 못한 나라는 후진국인 몽골 말고는 우리밖에 없다"며 "농촌 의원들은 이러한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고 했다.

전남 나주가 지역구인 민주당 배기운 의원은 지난 7일부터 당사에서 FTA 반대 단식농성을 벌이며 '저지'분위기를 띄우려 안간힘을 썼다. 허상만 농림부 장관이 이날 민주당사를 찾아 "FTA 관련 지원기금 출연액을 3천4백억원 증액하고 부채경감 방안도 추가하겠다"며 FTA 처리를 부탁했으나 농촌 의원들은 이 또한 거부했다. 한나라당의 농촌의원들도 9일 오전 긴급 모임을 갖고 저지대책을 논의키로 했다. 이들은 최대한 투표를 저지하되 만일 투표를 할 경우는 무기명이 아닌 기명(記名)으로 할 것을 요구키로 내부 방침을 세웠다. 기명으로 할 경우 의원들이 자신의 찬반 여부가 노출되는 것을 꺼려 쉽게 찬성표를 던지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

앞서 지난 2일 박관용 국회의장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모여 FTA 처리를 합의한 것도 이들 농촌 의원에겐 별 소용이 없다. 오직 두달여 앞으로 다가온 총선만이 안중에 있을 뿐이다. 농촌지역 의원들은 공공연히 "FTA 처리를 총선 뒤로 미루자"며 "어차피 몇 달 미룬다고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일부 야당 농촌의원들은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처리에 앞장서야지 야당이 왜 먼저 나서느냐"며 국가 중대사를 놓고 여야 간 책임 떠넘기기까지 하고 있다. 전국농민연대 등 농민단체들도 9일 여의도에서 FTA 비준처리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눈치만 살피는 농촌 의원들과 일부 농민단체의 반대로 FTA 비준이 늦어짐에 따른 심각한 악영향을 우려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또 벌써 곳곳에서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완전히 잃을까 우려하고 있다. 협정문에 서명한 지 1년이 지난 데다 칠레 의회가 지난달 말 비준안을 통과시킨 상황에서 또다시 비준안 처리가 안 될 경우 외교적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있을 다른 나라들과의 FTA 협상도 자연히 지장받게 된다.

최근 산업자원부의 보고서는 국내에서 FTA처리를 미루는 사이 우리의 주요 수출경쟁국들이 잇따라 FTA를 체결한 탓에 한국의 수출이 올해 최대 4억~5억달러까지 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에 대해 동국대 곽노성 교수는 "FTA는 국가 간 경쟁 문제이므로 여와 야, 도시와 농촌의 구분은 아무 쓸모가 없다"며 "한.칠레 FTA는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비준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강갑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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