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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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개학하는 날 오랜만에 운동장 조회가 있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은 안보이고 교감선생님이 훈시를 하셨다.교장선생님이 또 뭔가 딱 들어맞지 않는 예를 들어가며 말씀하실까봐조마조마하지 않은건 좋았지만 아예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걱정이 되었다.그래서 나는 조회를 마치고 서무실에 가서 사무 보는누나에게 물어보았다.
『저… 교장선생님 어떻게 되신 거죠.방학 동안에 갑자기 시집이라도 가신 건가요.』 사무 보는 누나가 안경을 벗어들고 깔깔웃었다.나이는 아직 서른도 안됐을텐데 눈이 몹시 나쁜 모양이었다.누나가 나를 쳐바보면서 말했다.
『질투하는 거니.그게 아니라 입원하셨어.불편하신 데가 있나봐.』 『다행이네요.전 또 절 버리고 신혼여행이라도 가셨나 그랬죠.중한 병인가 봐요.개학식에도 안나오신 걸 보면.』 『아냐,나이드시면 다 어딘가 아프고 그러잖아.한 두 주일쯤 뒤면 나오실 수 있다니까 난치병은 아닌가봐.』 교실로 돌아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어쩐지 우울하였다.나이가 들면 다 어딘가 고장이 나서고쳐야 한다는게 날 우울하게 만든 거였다.언젠가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의사인 걔네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가 떠올라서였다.
사실 대부분 나이든 사 람들의 경우에는 병을 치료한다는 게 고장난 부분을 적당히 땜질해서 임시로 조금 더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걔네 아버지가 그랬던 거였다.
개학 첫날이라 오랜만에 보는 아이들과 건성건성 인사를 나누는것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졌다.오래간만에 만나는 애들하고는 할말이 더 많아야 할텐데 이상하게 거꾸로였다.자주 보는 애들하고는 할 말이 많은데 오랜만에 만나면 더 할 말 이 없어지는 거였다.그래서 사람들은 매일 만나는 가족하고도 지겨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건가 보았다.
3교시가 끝나고 매점에 갔는데 계희수가 공중전화에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희수가 손을 흔들길래 나도 웃어주면서 아는 체를했다.그러고 보니 계갈보와 내가 아주 친한 사이인 것 처럼 생각됐다.하기야 나는 계갈보가 말할 때 어쨌든 이 라는 낱말을 자주 쓴다는 것도 알고 있기는 했다.어쨌든 나는 계갈보의 말버릇 말고도 많은 걸 알고 있는 친구이기는 했다.
『그땐 왜 그렇게 갑자기 서둘러서 간 거야.』 교실로 돌아가는 계단을 오르는데 계갈보가 따라붙었다.
『아냐,날이 밝으면 집에 가야지 원래부터 그러고 있었거든.』『아닐 걸.오빠가 나오니까 당황하는 것 같았단 말이야.』 『아그 대학생.아냐,뭐 난 그전부터 다 알고 있었는데 뭐.』 『동거한다고 소문난 걸 너도 믿는단 말이구나.아냐.틀렸어.같은 아파트에서 동거는 하지만 어쨌든 같은 방을 쓴 적은 없다구.그 사람은 그냥 보호자야.아빠가 고용한 가정교사라구.』 개학 첫날이라 오전 수업만 하고 파했다.방과 후에는 악동들과 분식집으로가서 써니네 친구들을 만났다.써니가 빠져서 우리는 7명이었는데,우리는 옛날처럼 신촌거리를 몰려다녔다.그러면서 나는 써니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양아 말이 써니 엄마도 이젠 어느정도 안정이 됐다고 그랬다.그말도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그럼 써니는,내 써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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