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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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창밖의 어둠이 어스름으로 바뀌고 있었다.아침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실내는 아직 여전히 어둑어둑하였다.
『제 정신이 드니까 정말 싫어지더라구.』 계집애가 잠옷의 단추 하나를 만지작거리면서 저혼자 고개를 가로저었다.마치 전에 고문당하던 장면을 되돌아보듯이 그애는 끔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혹은 마치 무언가 아주 신 것을 혀끝에 맛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뭐가 싫어진 건데…?』 그애가 한동안 침묵하고 있었기때문에 내가 물었다.그건 또 내가 그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글쎄…뭐 다 싫어진거지 뭐.미국도 싫구 산다는 것도 싫구 남자애들도 싫구 학교도 싫구…아빠도 싫구 아빠의 여자도 싫구…하여간 다 싫어진 거지 뭐.』 『그러니까 희수 너 자신만 빼고는 다 싫어진 거네.』 그애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면서 반짝 웃었다.
『맞아.사실은 나 자신이 싫어진 거야.이렇게 말하면 간단한 걸 그랬네.근데 난 다른 것들한테만 핑계를 댄 거지.』 『난 뭐 꼭 그런 뜻은 아니었어.』 『어쨌든 난 견딜 수가 없었어.
엄마한테 전화를 했지.엄마는 그때 한국에 살지 않을 때야.엄마는 그때 일본에 살고 있었거든.엄마도 한국이 싫어졌다구 그러면서 일본에 가서 살 때였거든.사실은 엄마 애인이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엄마 가 일본으로 따라갔다는 걸 난 다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전화했더니 엄마가 내게 뭐라구 그랬는지 알어.』 계집애가 말을 멈추고 창밖을 멍하니 한동안 내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엄마 나 다 싫어졌어 나 힘들어 라구 내가 그랬거든.
엄마가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는 거야.얘 거긴 교회같은 거 없니.』 그애가 또한번 나를 바라보며 반짝 웃었다.너무나 허전한 웃음…웃음은 웃음인데 사실은 눈물이라고 부르는 게더 어울릴 그런 텅 빈 웃음….
『가방에 내 물건들을 넣구…내 물건이라구 그러니까 우습네…내께 뭐 있겠어.아빠 돈을 좀 슬쩍해서 무조건 서울로 날아와 버렸어.나 자신이 아니구 마치 미국이 싫어진 것처럼.』 『그게 언제지?』 『그게 지난 겨울이야.그러니까 작년 크리스마스 직전이었어.친척들 집도 있었지만 무조건 호텔에 들어갔지 뭐.그리구나서 아빠한테 전화를 했어.서울에 있다구.미국은 싫다구 그랬지뭐.아빠가 다음날 날아왔어.그래서 이 아파트도 구해준 거구 학교도 해준 거구….』 그런 이야길 하는데 인기척이 있어서 보니까 웬 남자가 거실 입구 쪽에 서 있었다.잠옷바람으로,졸린 눈빛을 하고.난 너무나 깜짝 놀라서 할 말을 잃고 있었다.그애가웃었다. 『일어났어? 인사해요.달수라구 학교 친구예요.이쪽은 이 아파트에서 나하고 같이 사는 호성이 오빠구.』 나는 엉거주춤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와 악수를 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 남자가 바로 소문으로 듣던 대학생이구나 그렇게 생각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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