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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스들이여, 네버랜드를 떠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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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국제적 ‘훈남’으로 호가 난 이탈리아 남성에 대한 환상이 산산조각나는 뉴스를 접했다. 평균 36세가 되도록 이들이 도통 부모 슬하를 떠나려 하지 않자 보다 못한 정부가 내년 예산 20억 유로(약 2조6000억원)를 풀어 집세를 지원키로 했다는 것이다. 부모 집에 얹혀 살면 자연히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게 되니 장차 나라 발전에 지대한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돈 대준다고 이탈리아 남자들이 홀로서기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구직난에 치솟는 집세를 핑계로 내세우지만, 세끼 밥상 대령은 물론 셔츠에 팬티까지 빨아 다려주는 엄마 치마폭을 벗어나기 싫은 게 솔직한 속내라서다.

어디 이탈리아 남자들뿐일까. 나이가 꽉 차고 넘치도록 부모의 등골을 빼먹고 사는 신(新)인류의 등장은 가히 전 세계적 유행이라 할 만하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무섭게 집을 떠나 독립적인 인생을 개척했던 미국 젊은이들도 예외가 아니다. 22~29세 청년 중 3분의 1이 부모 돈으로 의식주를 꾸린단다(HSBC 5월 조사 결과). 뉴스위크 최신 호는 이들 젊은이를 ‘네버랜드(피터팬이 살았던 환상의 섬)의 나르시시스트(자기도취자)들’이라 명명했다. 먹고사는 구질구질한 문제는 부모에게 떠맡긴 채 자기들은 빈민촌에 집 지어주고 아프리카에 에이즈 환자를 도우러 다니며 이상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칭송할지 몰라도 부모 입장에선 밉상이 따로 없다.

우리나라 신세대들 역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는 아직도 다 큰 아들 냄새 나는 빨래를 해주며 산다더라” “○○네 딸은 마흔이 다 되도록 시집갈 꿈조차 안 꾼다더라.” 만날 때마다 처지가 안됐다 싶은 친구들 소식을 전하는 부모님의 표정엔 안도의 기색이 역력하다. 부모 집에 더부살이 않고 제 갈 길 가는 것만으로도 효자·효녀 자격 충분하다 하신다. 아마 우리 부모님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편안한 노후는커녕 이미 독립하고도 남았을 나이의 아들딸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는 부모가 한둘이 아니다.

일자리 구하기 힘들다며 학업에 뜻이 없어도 가능한 한 학창시절을 길게 끄는 풍조만 해도 그렇다. 이른바 졸업기피증이다. 대학생 중 37%가 이런저런 이유로 휴학 상태란다(2006년 교육통계연보). 휴학한 자녀들 어학연수, 배낭여행 비용 대려고 다 늦게 시급 4000원짜리 마트 계산원으로 취직하는 엄마들도 여럿 봤다. 제 능력보다 턱없이 높은 곳만 쳐다보는 만년 취업 재수생들, 직장 때려치우고 당당히 돈 대달라며 유학 떠나는 아들, 결혼 후에도 손자손녀 양육비에 사교육비까지 보태달라 떼쓰는 딸들 역시 제 발로 못 선 ‘캥거루족’들이다.

하지만 누굴 원망할까. 공부하란 소리만 해댔지 냉엄한 삶의 현실을 조목조목 가르치지 못한 우리네 교육 탓이 크다. 그러니 이제라도 공부만 잘한다고 끝이 아니라 머리 크면 제 밥벌이 스스로 하는 게 당연함을 일러줘야 한다. 남 보기 그럴싸하지 않아도 할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행복인지, 열심히 돈 벌어서 자기 식구 부양하는 게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도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다간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

미국 신세대의 부모인 베이비 붐 세대(baby boomer·1946~64년 출생자들)는 그나마 능력이 있어 은퇴를 늦추거나 노후자금을 헐어 자녀들의 ‘사회안전망’ 노릇을 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 교육에 ‘올인’하느라 변변한 노후 대비도 못하고, 정년퇴직이나 재취업은 기대 난망인 한국의 ‘낀 세대’들은 그럴 깜도 안 되지 않나. 수능이 보름 앞이다. 수능이 끝나고 나면 자녀와 함께 ‘진짜 공부’를 시작하자. 인생에서 결코 공부가 다가 아님을 가르치자.

신예리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