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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누드 여인의 누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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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누드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는 건 태고 이래 없을 터다. 인류 최초의 스캔들, ‘이브의 사과’ 사건으로 알몸의 진실이 밝혀진 뒤 누드는 무시로, 그리고 흔히 위태롭게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누드가 논란의 정점에 선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1863년 ‘풀밭 위의 점심’을 발표했을 때 그것은 사상 최악의 스캔들이었다. 정장 차림의 두 신사 옆에 벌거벗은 여성이 앉아 있고 벗은 옷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니.

사실 그것은 마네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조르조네(또는 티치아노)의 작품 ‘전원의 합주’를 본떠 그 미학적 전통에 맞춰 그린 것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두 남성 앞에 음악의 여신 뮤즈가 알몸으로 나타나 함께 피리를 분다. 그런데 이 그림 앞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 왜 마네의 그림을 보고는 역정을 낸 걸까.

현실 속의 여인이 등장한 탓이었다. 르네상스 이래 여성의 누드가 수없이 그려졌지만 그것은 모두 신화나 전설 속 인물이었다. 여신이 좀 벗었기로서니 누가 뭐라겠나. 어차피 여신이 평소 뭘 입고 다니는지 본 사람이 있기나 하냔 말이다. 하지만 마네 그림 속의 여성은 당시 유행하는 옷을 입은 (또는 가진) 현실적 인물이었다. 그림 앞에서 부도덕한 상상을 하기엔 현실적 인물이 보다 수월할 터다. 그만큼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즉각적이었던 거다.

최근 한 유명 발레리나의 누드 사진 파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국내 무용수의 누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0여 년 전 당대 최고의 무용수들이 누드로 춤추는 모습을 찍은 사진집이 발간된 적 있었다. 무용 전문 사진작가 최영모씨의 『벗은 춤(Dances Nudes)』이다. 당시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그들의 알몸을 보고 감동이 있었을지언정 불만을 터뜨린 사람은 없었다. 징계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사진은 토슈즈만 신었을 뿐 춤추는 발레리나가 아니었다. 그저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은 남성의 무릎 위에서 고혹적 포즈를 취한 반라의 여인일 뿐이었다. 그러니 보는 이들의 상상력이 보다 빠른 속도로 보다 자유롭게 나래 펴지 않겠나.

국립발레단 측의 곤혹감도 그래서 이해할 수 있겠다. 진보적 실험이 있어야 발전이 가능한 건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전통과 권위가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모래 위의 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파문이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됐다고 나는 본다. 우리의 가엾은 발레리나가 1개월 감봉 처분을 받긴 했지만 마네의 수모에 비하면 그 정도는 모기 눈물일 테니 말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런 소모적 논쟁은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 하는 얘기다. 누드를 예술이냐 외설이냐 나누는 것은 그 경계도 모호할뿐더러 나누는 것 자체도 의미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상이 여신이건 여인이건 또는 남성이건, 성적(性的) 판타지가 녹아 있지 않은 누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판타지가 잠들었던 상상력을 일깨우고 그렇게 눈을 뜬 예술적 영감이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붓과 끌을, 그리고 카메라를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관음증(觀淫症)으로 몰아붙이는 어리석음도 더 이상 범하지 말자. 오늘날 ‘풀밭 위의 점심’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지만 그 앞에 선 전 세계 수많은 관람객들이 모두 관음증 환자는 아니다. 나도 발레리나의 누드가 썩 내키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것은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심미안을 갖지 못한 탓일 수 있는 거다. 앞으로 그것이 불후의 명작이 될지 누가 알겠나. 의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고무풍선처럼 부풀린 채 끝나버린 수많은 여인들의 누드와 운명을 같이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관람객이 아니더라도 예술과 외설,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스스로 아는 것이 곧 누드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