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과주말을] 날실과 씨실로 엮은 ‘가족의 일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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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내 안의 황무지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
윤영수 지음, 민음사, 256∼284쪽
세트 1만6000원

다섯 살배기 아들이 15층 아파트에서 떨어졌다. 즉사였다. 남편과 나는 도망치듯 2층 양옥으로 이사했다. 회사를 그만둔 나는 이삿짐을 채 풀기도 전에 소설에 빠져들었다. 도피처 삼아 읽기 시작한 소설의 권수가 목표했던 100권을 넘어설 무렵, 남편의 등에 붙어있는 이상한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랫집 여자 등에도, 길을 걷는 사람들 등에도 그림이 붙어 있다. 알고보니 내가 사람의 생각을 읽게된 것이다. 대전으로 출장을 다녀온다며 짐을 꾸리는 남편의 등에 야자수가 무성한 이국의 해변이 보였다.(‘내 안의 황무지’)

과작(寡作)으로 소문난 윤영수가 1년 만에 10편의 작품을 부려놓았다. 새 단편집『 내 안의 황무지』,『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민음사)다. 한 세트를 이루는 두 권의 책은 각각을 감싼 표지만큼 다른 빛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채색으로 장식된『 내 안의 황무지』에는 진지하고 철학적인 작품들이, 화려한 색으로 휘감긴 『내 여자친구의 귀여운 연애』에는 경쾌하고 술술 읽히는 작품들이 엮여있다. 환상에 가까운 황당한 설정, 하지만 그 아래 이야기는 현실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날실과 씨실이 부지런히 오가며 지어낸 듯 이야기의 얼개 역시 쫀쫀하다. 잠꼬대로 앞날을 예언하는 소녀(‘만장’), 신혼부부의 삶을 갉아먹는 소문 (‘윗 마을 혼인잔치’), 노망든 노모의 돈을 가로채기 위해 연극을 벌이는 연극배우(‘이인소극’)… 작품 대부분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을 맴돌지만 이야기는 어느 하나 비슷한 것 없이 다채롭다. 평론가 정영훈은 윤영수가 그리는 ‘가족’을 ‘연옥’이라 했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에서 등장인물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책머리에서 윤영수는 ‘부끄럽게 책을 내민다’ 했다. 그가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만큼 독자는 즐거워지는 것이리라. 얼결에 베어 문 그의 소설은 새콤달콤하다. 느슨한 가을 볕 아래 한편, 또 한편 아껴 읽고 싶은 책이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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