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용씨 '고물車 출두 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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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청사 앞. 30여명의 취재진이 1백30억원대 괴(怪)자금 은닉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아들 재용(在庸.40)씨의 출두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시쯤 낡은 짙은 회색 승용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세차한 지 오래된 듯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낡은 검은색 코트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내렸다. 푸석푸석한 얼굴을 한 재용씨였다.

최근 10억원짜리 고급빌라 3채를 구입한 것으로 알려진 전직 대통령 아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남루한 행색이었다. 승용차는 재용씨를 내려놓기 무섭게 대검 정문을 빠져 나갔다.

재용씨가 타고온 승용차는 1990년 생산된 기아 콩코드(97년 단종)였다. 차량 소유주는 李모(53.서울 서대문구)씨로 돼 있다.

그의 '초라한 등장'을 보고 검찰 관계자와 취재기자들 사이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오갔다. 얼마 전까지 수십억원을 여러 기업에 투자하던 재력가의 모습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무 생각없이 이렇게 출두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았지만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재산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2천억원대의 추징금을 내지 않고 있는 全전대통령도 지난해 법정에서 "재산은 29만1천원뿐"이라고 주장하면서 판사와 설전을 벌인 바 있다.

한편 재용씨는 이날 검찰이 괴자금 1백30여억원의 출처를 추궁하자 "외할아버지인 이규동씨에게서 받은 돈"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재용씨가 돈의 출처를 감추기 위해 이미 사망한 李씨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재용씨가 뭐라고 말하든 우리는 나름대로 출처를 찾아낼 만한 대책이 있다"고 했다.

검찰은 이 돈이 全전대통령 비자금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이를 입증할 단서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검찰은 이날 밤 늦게까지 조사한 뒤 일단 재용씨를 돌려 보냈으며 6일 다시 소환한다.

전진배 기자<allonsy@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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