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향기] 눈물 섞인 다림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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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엄마가 카키색 군복을 풀을 먹여 정성껏 다림질하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물을 입으로 뿜어가며 마치 옷과 대화라도 나누는 표정으로 다른 옷을 다리실 때와는 사뭇 달랐다. 정성껏 다린 옷을 옷걸이에 건 뒤에도 혹여 주름이라도 갈까 두서너번 확인할 때까지 엄마는 거의 말이 없으셨다. 하지만 다림질하는 엄마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고, 엄마 옆을 지키던 나는 덩달아 즐거웠었다.

꼼꼼한 엄마의 손길을 거친 군복은 아버지의 출근길에 빛이 났었다. 군인 관사에서 거주했기에 출퇴근 시간이면 같은 옷의 아저씨들이 길을 메웠지만 나는 아버지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아버지의 군복은 늘 달라 보였다. 그러나 군용 지프를 탈 수 있고 당번병이 심부름을 해주는 친구네와 우리 아버지의 계급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는 아버지의 군복이 창피하기만 했다. 한동안 내 장래 희망이 장교와 결혼하는 것일 만큼 어린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그러나 엄마의 다림질은 한결 같으셨다. 아버지께서 베트남에 가 계신 동안에도 엄마의 다림질은 멈추지 않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만나러 부산으로 가던 날 엄마는 곱게 다림질한 군복을 들고 가셨으니까.

원치 않게 아버지가 군복을 벗게 됐을 때 엄마는 마지막으로 군복을 다림질하며 많이 우셨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오늘 다림질을 한다. 남편의 하얀 도복을 다리기 위해서다. 결혼 생활 이십년 중 내 다림질은 서너 차례 멈춘 적이 있었다. 당신 외동딸의 남편감이 태권도 사범이라는 걸 알고는 대한민국 국민, 특히 남자라면 다 하는 운동인데 그걸 어떻게 직업이라고 하냐며 아버지는 걱정이 많으셨다. 곱게 키운 딸을 실업자에게 준다는 말씀에 식구들이 웃어댔지만 마냥 기우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외국에서의 생활을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사는 것이 너무 고달플 때면 도복 다림질을 멈추고 남편에게 시위를 했다. 바느질 공장이나 의류 도매나 소매상을 해야 한다는 이민 선배의 설득에도 남편은 오로지 태권도 사범의 외길을 걸으려 했고, 생활을 책임지다시피 해야 하는 나는 나대로 남편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이민 생활은 일손이 많아야 하는데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의 도움이 없이 하는 일들은 힘만 들고 손에 쥐는 것이 없었다.

내 닦달에 뒤늦게 길을 바꿔 보려던 남편은 원치 않은 일을 해서인지 병을 얻어 한동안 누워 있어야 했고, 그 사이 다림질은 다시 멈춰 있었다. 남편의 퇴원이 결정되던 날 집으로 돌아와 옷장 속의 도복을 꺼내 들었다. 한동안 주인을 잃고 있었던 도복은 초라해 보였다. 누렇게 바래고 구겨진 모습이 병상의 남편 모습인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눈물을 흘리며 도복을 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를 생각했다. 철들면서부터 창피해 하던 아버지의 계급장까지도 엄마는 소중히 다림질하셨다. 남편이 우리 곁을 지켜줄 수만 있더라도 욕심 부리지 않고 도복 다림질을 멈추지 않겠다고 나 자신에게 맹세했다. 생활이 좀 어렵더라도 엄마가 아버지께 하셨듯 나도 남편이 태권도 사범으로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도복 다림질로 내 자신을 다독이려고 한다.

박영희(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4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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