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사람만 바꾸면 될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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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현역 국회의원 중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 추세를 보면 검찰의 매운 손에 무너질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분노한 유권자들의 발길질에 고꾸라질 사람 숫자도 엄청날 것 같다. 최근 영호남 지역의 여론조사에서는 지역구 현의원의 90% 이상을 물갈이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부패정치에 대해 국민이 실망하고 매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람만 바뀐다고 정치가 반드시 깨끗해진다는 보장은 없다. '정치와 돈'에 관한 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새 사람들도 얼마 안 있어 비리 혐의로 쇠고랑을 차는 일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돈과 관련된 정치부패를 근절하려면 돈을 받는 쪽인 정치인, 주는 쪽인 기업, 그리고 범법자 처리 문제라는 세가지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절한 대책을 세워나가야 한다.

먼저 인정돼야 할 점은 민주주의를 하자면 후보들이 경쟁하는 선거가 필요한 것이고, 그에 따라 상당한 정치자금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금액이나 사용액의 상한선만을 엄격하게 책정하고 고집한다면 모든 정치인을 범법자로 만들 위험이 있다. 차라리 상한선은 여유있게 해두되 모금과 사용에 있어 투명성을 철저하게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지구당 폐쇄 등 선거제도를 개혁해 정치자금 수요 자체를 줄여주는 노력도 병행해야 하겠다.

다음으로 기업 측이 제공하는 정치자금은 크게 봐서 소위 투자적 성격과 보험적 성격의 자금으로 대별된다. 당선 또는 집권 후 특혜나 호의를 기대하고 돈을 주는 경우가 전자에 해당하고, 약점 때문에 보복을 우려해 자금을 내는 경우가 후자에 속한다. 이권을 노린 정치자금 수수가 횡행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무엇보다 경제 문제에 관한 정부의 간섭과 통제가 최대한 줄어들고 행정의 투명성이 대폭 제고돼 특혜 부여가 불가능할 정도가 돼야 한다.

보험성 정치자금은 주로 약점을 가진 기업이 제공하게 되므로 이런 돈을 줄이려면 기업의 약점이 해소돼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 쌍방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기업의 약점 중에는 기업 측이 책임져야 할 부분과 정부의 과도한 행정규제를 피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탈법 또는 편법 사례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해서 검찰은 이번 대선자금 수사에서 기업에 대한 조사나 책임추궁을 자제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기업들은 차제에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투명성을 높이는 등 자정노력을 강화해야 약점을 줄여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부로서는 각종 규제를 크게 완화함으로써 기업의 불가항력적인 위법 또는 탈법행위를 줄여주어야 하겠다. 아울러 현재로서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 묵인된 상태에 놓여 있는 기업들의 과거 잘못, 즉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등에 관해서도 제한적 사면 등 적극적인 조치를 통해 기업이 깨끗하게 새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좋겠다.

마지막으로 법규를 어긴 정치인에 대해 과거에는 응분의 처벌이 이뤄지지 못했다. 혐의가 있어도 버텨 왔고 수사기관들도 소극적이었다. 드물게 유죄판결을 받은 정치인들도 정권이 바뀌면 사실상 복권이 이뤄졌고 오히려 남보란 듯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돼서는 정치자금의 수요와 공급제도에 관한 개혁이나 개선이 있다 해도 부패정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일단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고부터는 정치자금에 관한 법규를 위반한 정치인들은 예외없이 신속한 수사와 판결, 그리고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하며 정계로부터는 영구히 추방되는 전통이 수립돼야 할 것이다.

노성태 경제연구소장 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