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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할말은하자>13.말문 막았던 5.8조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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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대통령의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새 대통령이 나올테니 그때까지 적당히 지내자는 생각인가요.피차 얼굴 붉히거나 입장 난처해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통치권 차원이니 협조를 부탁합니다.』지난 90년 4월30일 金鍾仁 당시 청와대경제수석은 10대 그룹 기획조정실장들을 플라자호텔로 불러 이같이 부탁 아닌 부탁을했다. 약 한달 전이었던 3월27일 당시 盧泰愚대통령이 5대 그룹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부동산투기가 진정되도록 성의표시를 해달라」는 뜻을 전한 사실을 상기시킨 것이다.
財界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데 대해 盧대통령이 무척 화를 내고 있다는 분위기도 함께 전달됐다.
말이 협조 요청이었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협박이었다.
「5.8조치」(부동산 투기 억제와 물가안정을 위한 특별보완대책)를 사실상 주도한 金수석의 이날 움직임을 시작으로 朴弼秀 당시 상공부장관등 정부.청와대의 고위 간부들이 총동원돼 재계의「부동산 자진 매각」을 끌어내기 위해 파상적인 압력 을 가했다. 결국 10대 그룹은 1천5백70만평의 땅을 내놓아야 했다.
처음에는 1백50만평 정도로 청와대의 의중을 떠봤다.그러나「어림도 없다」는 반응을 접한후 줄다리기 끝에 전체 규모가 1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었다.말이「자진」이었지 실제로는「말 한마디 못하고 당한 강제매각」이었다.
『그때 분위기는 한마디로 서슬이 시퍼랬습니다.항변할 수 있는상황이 아니었어요.뭔가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려 하면 통치권을 들고 나오는데야 도리가 있어야죠.』5.8조치때 재계쪽 입장에서이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던 田大洲 全經聯상무는 이제 야 그때의상황에 대해 할 말을 한다.
정부가 재벌 오너들을 불러 통치권을 들먹이며『땅을 내놓아라』고 윽박지르는 일은 자본주의의 기본인 사유재산권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公共의 이익을 명분으로 이같은 超法的 일이 발생했으며 지금도 이런 분위기는 없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대기업이 땅이나 돈 문제에 연관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죄인이 되고 맙니다.여론을 앞세워 몰아치는데 견딜 재간이 있나요.』 田상무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
D社의 한 임원은『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특히 언론이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물론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기업 자체 문제도 적지 않다.
일부 기업인의 非도덕성등 재계가 국민의 눈에「非도덕적인 존재」로 비춰진 데는 스스로의 책임도 크다.
〈金王基기자〉 한 청와대 관계자는『부동산 가격 급등에 따른 사회적 손실등을 줄이기 위해 다소 무리인줄 알면서도 불가피하게정책을 밀어붙이는 경우가 있다.정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가.또재벌들의 영향력이나 행태를 생각할때 정부만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고 반문했다.
그러나 이런 불가피성을 감안하더라도『할 말 못하고 일방적으로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재계의 주장이고,실제로 5.8조치,그리고 뒤이은「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조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억울한 부분이다.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공장안의 땅을 잘라 팔아야 하는 일은 약과였다.「비업무용」으로 판정받아 팔도록 강요됐던 땅 중에는 오래 전에 기업들이 정부 권유로 강제로 떠맡다시피한 것들도 많았다. 대성탄좌의 聞慶 조림지는 산림청 요청에 의해 산 것이었고,한진그룹의 제주도 제동목장은 정부의 축산진흥정책에 따라 억지로 인수했으며 한진은 잘 했다고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받기까지했었다. 당시 비업무용 판정을 받은 매각대상중 잠실 롯데월드 부지등은 최근 대법원으로부터『비업무용으로 볼 수 없다』는 판정을 잇따라 받음으로써 5.8조치의 非합법성은 법적으로도 입증됐다. 그렇다고 팔아버린 땅을 이제 와 돌려 받을 수 있는 것은아니다. 특히 자진매각분은 속내용이야 어찌 됐든 형식적으로는 기업들이 스스로 내놓은 것이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기업이 투기하는 곳은 아니다」는 도덕적 免罪符를 받은 것에 만족한다는 정도다.
최근 재계 일각에서『정말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우리의 입장을떳떳하게 밝히자』는 주장이 자주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상황은요원한 것 같다.
한 기업 임원은『文民정부가 들어선 지금도 과거 군사정권때 보다 크게 나아진 것은 별로 없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왜 정부나 언론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느냐고요.대응했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실제로 괘씸죄에 걸려 불이익 당하는 예가 아직도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익명을요구하는 다른 기업인의 말이다.
단적인 예로 5.8조치 당시 10대 그룹의 기조실장이었던 기업인들은 아직도 예외없이 당시 상황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아직은 입을 열 분위기가 아니다」는 것이다.기업이 정부에 대해 할말을 하기란 이처럼 어려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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