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과학자가 전하는 '北核 진실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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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당신에게 핵 억제력(Nuclear deterrence)을 보여주었다."(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아니 그렇지 않다."(지그프리드 헤커 미 로스알라모스 핵 연구소 박사)

지난달 8일 북한 영변 핵과학연구소. 7시간 동안 영변의 핵시설을 둘러본 헤커 박사와, 그와 동행한 金부상 간에는 이런 대화가 몇번이나 되풀이됐다.

金부상은 방사화학실험실 연구원이 헤커 박사에게 보여준 플루토늄 금속 2백g과 플루토늄 옥살산 분말 1백50g이 곧 핵 억제력이라는 입장이었다.

반면 헤커 박사는 플루토늄은 핵 억제력의 한 구성 요소일 뿐이라고 말했다. 핵무기, 곧 핵 억제력을 갖추기 위해선 기폭장치와 운반체로의 통합 능력도 필요하지만 북한은 이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 굴지의 핵 과학자 헤커 박사의 영변 방문도 북한의 전반적 핵 능력 평가에 종지부를 찍지 못했다. 金부상은 헤커 박사의 초청 이유로 "(핵 능력에 대한) 투명성 확보"를 들었지만 이번에도 모호성 전략을 버리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헤커 박사의 방북은 북한의 핵 시설 가동 현황과 재처리 능력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난 1년 동안 북한이 수차례 핵 시위를 벌였지만 이것이 전문가의 육안으로 확인되기는 처음이다.

그의 방북으로 확인된 것은 여럿이다.

첫째는 5MWe 원자로의 정상적인 가동이다. 지난해 2월 말 이후 순조롭게 가동되고 있다고 헤커박사는 전한다. 이 원자로는 매년 6㎏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이 원자로에 들어있는 사용후 핵연료봉을 재처리할 경우 얻는 양이다.

둘째는 5MWe 원자로 수조에 보관된 8천개의 사용후 핵연료봉이 사라진 점이다. 헤커 박사는 북한이 핵연료봉 금속의 밀봉을 해체하고,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을 확인했다. 이것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셋째는 북한의 재처리 능력이다. 헤커 박사는 "북한은 5MWe 원자로에서 핵연료봉을 꺼내 언제든지 재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재처리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이 수리가 잘 돼 있었고, 필요한 장비와 시설.기술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도 확인했다. 북한은 이 실험실에서 하루에 3백75㎏의 사용후 핵연료봉을 재처리할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북한은 이 실험실을 가동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헤커 박사의 방북을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이 한둘이 아니다. 첫째는 북한이 보여준 플루토늄이 과거에 추출한 것인지, 아니면 지난해 추출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다시 말해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핵 합의가 체결되기 이전에 생산한 플루토늄을 이번에 제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당시 한번에 걸쳐 62g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신고했으나 IAEA는 북한이 ㎏단위를 추출한 것으로 추정해 왔다.

둘째는 북한이 8천개의 사용후 핵연료봉을 모두 재처리했는지다. 북한은 지난해 6월 말까지 이들의 재처리를 완료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측 주장대로라면 25~30㎏의 플루토늄을 더 추출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다. 북한은 재처리가 끝난 사용후 핵연료봉에 대한 접근도, 미국 대표단에 보여준 플루토늄에 대한 추가 검사도 허락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는 이와 관련, "북한이 8천개 모두의 사용후 핵연료봉을 추출했을 가능성은 작다"고 말한다.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 계획도 논란거리다. 김계관 부상은 이번에 거듭 "북한은 이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시설과 장비.과학자가 없으며, 북한은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 쪽에 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2002년 10월 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 이 부분에 대한 견해차는 앞으로 북.미 간에 두고두고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북한이 헤커 박사에게 핵시설을 보여준 의도에는 대미 협상용과 핵 개발 시위용 두가지가 깔려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북한이 어느 쪽으로 나아갈지 주목된다.
오영환 기자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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