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쇼핑몰처럼 된 시대 관객 기대치 맞추기 쉽지않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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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40여년 전 처음 영화를 만들 때는 내 영화를 아시아 관객이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유럽과 미국 관객뿐이었죠. 흔히 세계화를 나쁘다고들 하지만, 이런 면도 있습니다. 저는 한국 방문이 처음인데 서울과 부산의 압도적인 열기와 아름다움, 지난 세월 동안 한국사람들이 이룬 성취가 놀랍습니다.”

 부산영화제를 찾은 독일의 거장 폴커 슐렌도르프(68·사진)를 7일 열린 핸드프린팅·마스터클래스 행사에 앞서 따로 만났다. 그는 1960년대초 아버지 세대의 영화를 부정하는 ‘오버하우젠 선언’으로 등장해 이른바 ‘뉴저먼시네마’로 독일영화의 중흥기를 만들었던 장본인 중 하나. 특히 성장을 거부하는 소년을 통해 시대상을 충격적으로 그린 ‘양철북’(79년), 신랄한 사회고발극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75년)등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이후 할리우드에 진출했다가 다시 독일로 돌아와 ‘레전드 오브 리타’(2003년)등 신작을 내놓았다. 부산영화제에는 카자흐스탄을 무대로 한 최신작 ‘울잔’을 들고 왔다. 최근 비평·흥행에서 고루 침체기를 겪고 있는 한국영화계에 도움말을 구하자, 낙관도 비관도 쉽게 하지 않는 그의 현자(賢者)같은 면모가 드러났다.

 “전통적인 예술영화의 관객이 줄어드는 것은 한국만이 아니라 문명적인 현상입니다. 지난 7월 안토니오니 감독이 죽었는데, 어떤 영화 종류의 죽음을 뜻하는 상징 같아요. 도움말은 힘드네요. 영화가 쇼핑몰처럼 되버렸어어요. 구찌나 아르마니같은 패션브랜드처럼 감독들도 브랜드가 됐지요. 장이머우 브랜드, 알모도바르 브랜드 하는 식으로요. 브랜드가 되기도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브랜드는 영화감독에게 감옥이기도 합니다. 늘 관객이 기대하는 같은 것을 생산해야 하니까요. ”

 영화계를 둘러싼 환경변화에 대해서도 문명성찰적인 시각을 들려줬다. “영화가 극장이 아니라 DVD, 인터넷, 심지어는 휴대전화를 통해 (아무때나 꺼내볼 수 있는) 책처럼 소비되고 있어요. 시청각적으로 새로운 시대지요. 좋다, 나쁘다 평가는 모르겠어요. 나는 활자를 좋아합니다. 간밤에도 새벽까지 톨스토이를 읽다가 잤지요. 당신도 신문기자지만, 요즘은 신문사도 인터넷 사이트가 있지 않습니까. 다만 내가 사랑하고 내가 만들어온 고전적인 영화가 이런 새로운 것들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양철북’의 원작자인 귄터 그라스가 10대 어린시절 나치친위대 복무사실을 밝혀 지난해 일대 파란이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전제를 달고 이렇게 말했다. “노벨상 수상 등으로 그는 ‘리얼한 사람’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기념비처럼 여겨지게 됐지요. 그는 ‘양철북’의 소년 오스카처럼, 비명을 질러서 그 기념비를 부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부산=이후남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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