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누가 캐릭터 잘 만드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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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호 15면

‘태왕사신기’와 ‘왕과 나’와 ‘이산’까지, 세 역사 드라마를 보면 머릿속에 인물과 이야기가 뒤섞이곤 한다. ‘왕과 나’를 볼 때는 아역 탤런트 유승호에게서 ‘태왕사신기’에 나오는 ‘담덕’의 이미지를 지워야 하고, 어린이들의 ‘양물’ 자르는 이야기는 ‘이산’의 박대수와 헛갈리지 않아야 하고, 서로 죽이고 죽는 궁궐의 음모는 어느 것이 어느 것이었는지 뒤섞이지 않게 따라가야 한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아역들의 설정 단계를 넘어 성인 연기자들의 발전 단계로 접어든 지금, 세 드라마 중 ‘이산’의 차분한 초반기 세트업이 가장 눈에 띄었다. 특히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렇다. 물론 ‘이산’이 정조(正祖)의 인간적 측면을 그린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에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그리려는 ‘태왕사신기’나 내시의 세계를 조명하는 ‘왕과 나’보다는 주인공의 인물 분석에 더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은 단순히 그가 어떤 성격이며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이냐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캐릭터는 주인공이 드라마 내내 처해야 하는 갈등 상황을 내포하고 있어야 하며, 앞으로 그가 어떤 사건을 벌이며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대해 일관성 있게 설명해줘야 한다.

‘이산’은 박지빈이 연기한 세손의 단계에서 왕이 되기 싫지만 살기 위해선 왕이 돼야 하는, 할아버지 영조의 계승자가 돼야 하면서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부인해야 하는, 만인지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해야 하는 정조의 내면과 외면적 갈등을 그려내면서 캐릭터를 잘 쌓아 올렸다. 어린 정조의 캐릭터를 이어받은 성인 정조(이서진) 역시 일관된 캐릭터와 상황을 연결하며 시청자들의 감정이입과 앞으로의 정조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도록 했다. 다른 드라마에 비해 아역 연기자와 성인 연기자 간에 ‘이물감’ 논란이 적었던 것 역시 이처럼 잘 쌓아 올린 캐릭터 덕분이었던 듯싶다.

반면 ‘왕과 나’나 ‘태왕사신기’에서 성인 연기자로 바뀌면서 일었던 연기 논란은 유승호가 연기를 잘했다거나, 문소리가 나이가 많아 보여서만은 아닌 것 같다. ‘왕과 나’에서 어린 성종은 사려 깊고 순수했고, 어린 윤씨는 강직함을 가진 여성이었던 데 비해 성인 성종은 갑자기 철없이 비뚤어진 인물로 변한 모습이고 윤씨 역시 성종의 사랑에 목매는 사람으로만 보인다. 문소리 역시 아역 시절 가녀리고 순수하게만 그려진 모습 때문에 자라서 태왕에 대한 이중적 감정을 지닌 ‘위험한 여인’이 되는 변화에 공감이 덜 가는 것이다.

‘태왕’의 캐릭터도 아쉽다. 미래에 드넓은 만주 벌판을 개척하게 될 태왕은 어떤 내면적 갈등의 단계를 거쳐 영토 확장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지니게 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그동안의 캐릭터 구축으로도 드러났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껏 ‘출생의 비밀’과 좁은 궁 안의 배신과 음모에 갇혀 있는 태왕은 결국 ‘사신(四神)’들의 도움을 받아 ‘운명이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선택을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남다른 스케일로 신화와 역사를 결합한 ‘태왕사신기’가 허공에 붕 뜬 판타지가 아니라 역사에 발 디딘 위대한 왕의 이야기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좀 더 다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 구축으로 설득력과 공감을 가져야 할 듯하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를 거쳐 영화 제작자로 활약한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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