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땅끝에 선 사람들(21) 대동강 물도 때가 와야 풀린다니,어디 대동강 물 뿐이겠는가.대동강 물이 아니라 그 무엇도 때가 오면 풀린다.그러나 그때라는 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고 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오뉴월 늘어진 쇠불알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거나 무엇이 다른가.익은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감나무 밑에 가 입 벌리고 누워 있으라 그 말인가. 우수 경칩이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지만 그건 절기일 뿐이다.사람 사는 일은 강물이 아니다.
노을이 붉게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하늘은 진홍빛이었고 그 여기 저기에 누군가가 찢어서 던져 놓은 듯한 구름이 함께 물들어 있었다.무슨 놈의 경치가 사람 애간장을 태우는 구나.시벌시벌 혼자 중얼거리며 길남은 방파제를 걸어나갔다.바 다위의 황혼이 그의 얼굴마저 붉게 물들이는 것 같다.뭐하고 뭐하고 만나면저런 게 되는 거지?젠장 바다가 오늘 같아서는,우리같은 놈이야어디 하룬들 살겠나.
그는 또 명국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사람 가는 길이 하나가 아니란 말이다.길이 대관절 뭐라드냐.사람이 다니면 그게 길이야.처음부터 어디 길이 있었다드냐.그래서 사람이 안 다니면 그땐 거기 풀 우거지고 뱀 지나다니고,그러면 그건 길이 아닌거야.』 길을 만들라는 소리였던가.아니면남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소리였던가.
가면 길이지,어디 길이 따로 있어서 여기까지 왔던가.방파제 위를 걸어나가며 길남은 오늘따라 자신이 왜 이렇게 슬프고 비장한 마음이 되는지 차라리 안타깝다.
황혼의 바다를 배경으로 검게 음각되어 서 있는 길남의 모습을,낮술이 취해 바다로 나왔던 화순이가 보았다.웬 놈이람.사내놈도 무슨 해 떨어지는 바다를 다 보러 나오나.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허청허청 방파제 위를 걸으면서 화순은 취한 눈으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내 팔자야 끝부러진 송곳이지.여기서 이렇게 술이나 마시다가,잡놈들 만나 잡년 되어 살다가 그러면 그만이지 또 뭘 어쩌게?나는 새에게 여기 앉아라 저기 앉아라 할까.내 마음을 내가 아는데,나는 그렇게는 안되는 년이다.여기 앉아서도 저기 생각 뿐이고,그렇지만 새도 깃을 쳐야 난다고 했는데 그랬는데 나야 깃이 있어야 날든 말든 비벼를 보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