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생활새풍속>18.느는 高學歷이민-인간다운 삶찾아 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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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차라리 양털을 깎는게 나아요.대기업 부장이면 뭘합니까.바늘방석에 앉아 매일 목덜미가 뻐근해 죽겠는데….월급쟁이 17년에빈껍데기만 남았지 사는게 아닙니다.훌훌 털고 정말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지난 24일 오후3시 서울동숭동 국제협력단에서 열린 호주.뉴질랜드 이민설명회에서 만난 金모씨(44.서울역삼동)는 자신의 점수를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학력.경력등을 점수로 환산해 일반 이민자를 선발하는 두 나라의 선발기준에 적합한가를 따지고 있었던 것.그는 명문S대출신에3백만원 가까운 월급여(보너스포함)를 받으며 국제업무로 잔뼈가굵은 소위 대표적인 화이트칼러.이날 설명회에 참석한 1백여명 대부분이 金씨처럼 고학력의 사무직 종사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5개 이민송출기관의 하나로 올해 들어서만 21회의 이주설명회를 개최한 이 협력단의 李秀光이주2 과장은 『이민이 붐을이루던 70년대에는 잘 살기위해,자식교육을 위해 「개척자적 정신」으로 이민을 떠났으나 요즘은 고학력의 중류층 이상 청장년들이 「새로운 삶」「보다 인간적인 삶」을 위해 일단 떠나고 보자는 식이 많다』고 했다.
5년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지난해 되돌아온 李모씨(44.
부산시)는 요즘의 새로운 이민성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케이스.
30대말에 서울의 대기업 방계회사인 H통상 전무자리까지 올랐던그는 어느날 캐나다로 투자이민을 떠나겠다고 사표 를 던져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너무 바쁜데 진저리가 나 이제 훌훌 떠돌아 다니고 싶다』는 것이 이민 이유였다.
그는 신물이 나도록 골프를 치다 무료해지자 그곳 조그만 한국인 회사에 취직,요즘은 그 한국지점인 부산에서 일을 시작했다.
남들은 직위상 「큰 손해」를 봤다고 얘기하지만 한동안 자연속에 파묻혀 자신이 원하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봐 후회는 없다고 했다.
지난해 해외이주신고를 한 사람은 1만4천4백여명으로 88년의3만1천여명에서 반으로 줄어들었다.또 이민대상국도 미국일변도에서 크게 벗어났다.
지난해 이민대상국은 미국이 8천명으로 역시 가장 많았으나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고 캐나다가 2천7백35명,뉴질랜드가2천5백69명,호주가 5백38명 순이었다.
88년에 불과 4명을 기록했던 뉴질랜드의 경우 폭발적인 증가를 보인 셈.
이민의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대상국이 달라지는외부적 요인 때문으로 우선 풀이 할 수 있다.
고학력.대기업의 직장경력.영어실력등을 이민자 선발기준으로 삼는 뉴질랜드.호주의 문이 활짝 열려 당연히 그에 적합한 사람이떠나게 된것.올들어 6월까지 이미 1천54명이 이주신고를 한 뉴질랜드의 경우,연고이주가 15명 뿐이고 98% 이상에 해당하는 나머지 1천39명은 사업이나 취업을 위해 떠난 이들이었다.
취업이주자를 선발하기 위한 통과점수는 28점.대학원졸업자에 최고점인 15점(고졸의 경우 2점)을 주고 직장경력 2년에 1점씩 가산점을 주는등 고학력 직장인들에게 단연 유리하게끔 돼 있다.고학력자들이 자꾸 몰리는 바람에 통과 점수가 몇년사이에 20점에서 28점으로 높아졌다.
이민알선업체인 호주의 서던 코스트와 뉴질랜드의 하젯 골리안 북아시아담당부장인 피터 金씨는 『이민상담자의 90% 이상이 大卒출신이고 좋은 직장의 사람들이 떠나겠다고 상담을 많이 요청해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는 경우가 많다』 고 했다.
이민업무를 취급하는 공무원및 사업자들은 이같은 이민성향의 변화에 대해 『갈수록 각박해지는 현실,교육제도의 문제점등에 대해고학력자들이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마련인데 마침 이들을 받아주는 출구가 열렸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 高惠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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