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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패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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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종이를 최초로 발명한 중국에선 12세기에 ‘종이 돈’을 만드는 기술이 꽃피었다. 바람에 날린다고 ‘날아다니는 돈’이라고 불렸다. 동전용 구리가 부족해 고안한 고육지책이었지만 금세 인기를 끌었다. 가볍거니와 찍어 내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를 초래한 건 당연한 귀결. 『동방견문록』을 쓴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지폐 몇 장을 수집해 유럽으로 가지고 갔다. 사람들은 ‘그걸 누가 돈이라고 받겠느냐’며 잘 믿지 않았다.

『달러의 몰락』의 저자 애디슨 위긴스는, 불법 도청이 빚은 워터게이트 사건보다 1971년 단행된 달러와 금의 태환(兌換) 금지 조치를 닉슨 대통령의 최대 과오로 꼽는다. 훗날 역사에 미친 여파가 비할 바 못 된다는 것이다. ‘금 1온스(약 31g)=35달러’의 금본위제를 폐지하자 지구촌 공용 화폐를 찍어 내는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의 가계·기업·정부 할 것 없이 마음이 느긋해졌다. 그 결과 미국은 돌이키기 힘든 무역·재정 ‘쌍둥이 적자국’이 됐다는 것이다. 워런 버핏의 우화대로 미국은, 금리·물가는 내리기만 하고 집값·주가는 오르기만 한다고 믿는 ‘낭비 마을’이 됐다. 부지런히 공장을 지어 일자리와 물건을 만들어 내는 ‘절약 마을’(아시아) 사람들의 제품을 빚을 내(달러를 찍어) 사 쓰는 일이 수십 년간 거듭됐다. 링컨 대통령도 남북전쟁 때 북군의 전쟁 경비를 대느라 ‘그린 백(Green back)’을 마구 찍어 냈다가 화폐가치를 떨어뜨려 혼란을 겪었다.

5년간 미끄러진 달러 값이 1유로당 1.42달러대까지 떨어졌다. 변동환율제 실시 후 34년 만의 최저치다. 원화로 따지면 달러당 913원대, 꼭 10년 전 1997년 10월 2일의 외환위기 직전 수준을 회복한 것이라 감회가 새롭다. ‘화폐가 실물을 가늠하는 베일’이라면 10년 동안 한국 경제의 체질은 강해지고 미국 경제는 약해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국민소득 2만 달러니 3만 달러니 하는 신기루 같은 환율 놀음에 걸려 들어 외환위기 직전처럼 ‘절약 마을’이 ‘낭비 마을’로 바뀌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8월 여행수지 적자 폭이 사상 최대라는 소식이 예사롭지 않다.

아울러 달러 패권, ‘팍스 달러리엄(Pax dollarium)’ 시대가 저문다면 새로운 발상이 시급하다. ‘기회의 언어’라는 영어와 달리 US달러가 ‘기회의 돈’으로서 빛을 잃어 간다면 유로나 위안화 시대의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