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만의 정상만남/김학준 단국대교수·정치학(긴급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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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늦은만큼 많은 열매 거두자/평양서 열린다고 「굴욕외교」 아니다/핵개발문제 등 확실한 다짐 받아야
우리 겨레가 남과 북으로 갈라섰던 때로부터 49년만에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게 됐다.기쁜 일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분단 반세기가 되도록 남북정상회담이 한 차례도 열리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동·서독은 이미 70년대초 정상회담을 실현했고 결국 90년에 통일을 성취했으며,철천지원수와 같던 이스라엘과 이집트도 이미 70년대말 정상회담을 실현했고 이것이 하나의 밑거름이 되어 지난해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사이에는 화해가 성립됐다.
이렇게 따져볼때 남북 정상회담이 이제야 열리게 됐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국제냉전이 끝나 유럽의 경우에는 동유럽과 서유럽이 모두「하나의 공동의 지붕」밑에 살면서 국경의 개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터에 크지도 않은 이 한반도에서는 남북 정상이 이제 겨우,그것도 미국 전직대통령의「중재」를 거쳐 만나게 됐으니 세계사앞에 크게 자랑할만한 일은 못된다.
그렇다해도 다행스런 일이다.「후발자의 이익」이란 말이 가르쳐주듯 뒤늦게 시작하는 사람이 먼저 시작한 사람의 행적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전진한다면 오히려 순조롭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평양에서 갖기로 합의한 마당에 왜 서울이나 제3의 장소가 아니라 평양에서 열기로 했느냐고 굳이 따지지 않겠다.72년 미국이 중국과 처음 정상회담을 갖게 됐을 때 그 장소는 베이징(북경)이었다.우리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듯 당시 미국대통령 닉슨은 베이징을 찾아가 중국의 마오쩌둥(모택동)과 회담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미국이 중국에 대해「굴욕외교」를 한다고 비판하지 않았다.오히려 미국이 냉전적 세계질서의 재편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했으며,실제로 닉슨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긴장 완화를 향해 치닫게 됐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회담의 내용이다.만일 이 회담이 회담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고,또 92년 발효된 「남북기본관계 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의 취지를 정신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살려나가는 쪽으로 합의할 수 있다면 큰 성공이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것은 남북한 사이에는 평화공존과 궁극적인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기본 틀이 이미 확실하게 마련돼 있다는 사실이다.방금 지적한 2개의 문서가 바로 그것으로,남과 북이 민족과 세계 앞에 엄숙히 약속했던 합의내용을 하나 둘씩 지켜나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의 정상은 새로운 합의를 이뤄내려고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이미 합의된 문서들의 실질적인 운영에만 합의해도 성공인 것이다.
필자는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전망을 갖는다.안팎으로 매우 심각한 어려움에 빠져있는 김일성체제가 숨통을 트기 위해서는 이번 회담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로선 꼭 확인하고 주목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북한의 1차적 의도가 우리 대한민국과의 관계개선에 있지 않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있는 것이 아닌지의 여부다.
만일 북한의 압도적인 관심이 미국과의 국교수립,그리고 그것에 뒤따를 일본과의 국교수립에 있을 뿐 대한민국과의 전면적인 관계정상화에 있지 않다고 하자.그렇다면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자기네 필요에 맞게 적당히 이용만 하려 할 뿐 남북 정상회담 그 자체를 진전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할 일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북한의 핵개발 문제다.북한이 진정으로 핵개발을 포기할것인가.아니면 남북정상회담,그리고 앞으로 있을 북―미수교회담 또는 개연성이 없지 않은 북―미 정상회담등 극적 성격이 강한 축제적 행사들로 세상을 홀리면서 뒤로는 핵개발을 계속할 것인가.만일 불행히도 후자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한반도의 역사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중대한 시기에 접어 들었다.너무 경계할 필요도 없고 너무 낙관할 필요도 없다.경계만하면 전진할 수 없고 낙관만 하면 함정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자기중심을 세워 흥분하지 말고 침착히,주도면밀히,의연히 대처하자.<독일 뮌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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