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CIA의 퇴조(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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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77년초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요르단 후세인 국왕에게 거액의 뇌물공세를 편 사실이 폭로됐을때 이 사건은 박동선 스캔들과 맞물려 한동안 워싱턴 정가를 시끄럽게 했다. 그 무렵 방송에 출연한 밴스 국무장관은 『잘못한 일이 아니다』고 거듭 강변하다가 기자가 『그렇다면 박씨 사건도 정당화 할수 있지 않겠는가』고 묻자 밴스는『우리나 한국이나 제나라 이익을 위해 외국에 나가 돈을 쓰는 것은 매한가지 아닌가』라고 대답해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했다.
밴스의 이같은 답변은 CIA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면 그와 유사한 어떤 비합법적 사건도 함께 정당화 할 수밖에 없는미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아닌게 아니라 미국의 최고정책결정기관인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정보를 제공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있는 CIA가 그 고유 임무를 훨씬 벗어나 외국의 정책도 좌우하는 정치공작조직의 역할까지 담당해왔음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클린턴 정부가 출범한후 CIA국장에 취임한 울시가 『우리(CIA)는 소련이라는 거대한 용 을 죽였다』고 공언한 것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정부」로 불리는 CIA의 막강한 힘을 짐작케한다.
그러나 소련등 동구권이 붕괴되고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CIA의 기능과 임무도 상당한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클린턴 정부가 한해 2백80억달러에 달하는 정보예산을 향후 5년에 걸쳐 70억달러나 삭감하기로 한 것도 CIA의 기능 축소와무관하지 않다.물론 정부의 이같은 계획은 CIA 내부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이 있다.작년초 CIA는 새로 지은 본부건물 입구 바로 앞에 베를린 장벽의 한 토막을 옮겨다 세워놨는데 이것은「과거의 용들은 죽었지만 앞으로 수많은 뱀들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미 유에스뉴스 & 월드 리포트지 최신호는 최근 몇년간 CIA가 보여준 무능·부패등의 구체적 사례까지 열거해가며 CIA의 뒤바뀐 부정적 이미지를 폭로했다.CIA 요원들에게서 더이상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를 찾아보기는 어렵게 됐다는 것 이다.「CIA 대수술론」도 제기되고 있다는데 이미 거대한 몇마리 용들을 잡아버린 CIA가 테러·마약등 새로운 뱀들을 잡기 위해 어떤 모습을 보일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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