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사람답게 사는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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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모처럼 동창회라고 나갔더니 힘들다는 이야기뿐이다. 산다는 축에 드는 친구들이 더 엄살부리는 것 같아 몇 마디 핀잔을 주었다. 그만큼 벌었으면 어려운 사람과 나누고 공연장도 자주 찾으라고 했더니 그 중의 한 친구가 정색을 하고 반문한다.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얼마가 있으면 안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순간 들떠 있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불쑥 10억원이라고 외쳤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 푸념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대부분 자녀 교육과 노후 대책이 걱정이었다.

천문학적인 사교육비를 감당하느라 저축은 엄두도 낼 수 없고 겨우 마련한 집까지 팔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무일푼으로 은퇴하면 당장의 생활도 문제지만 큰 병이라도 얻으면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팔 집이 없으면 전세라도 줄여 교육비를 대야 하고, 먹는 걸 줄여서라도 종신보험은 따로 들어야 한다는 말이 더욱 기가 막혔다.

사교육만 없어질 수 있다면 지금보다 몇 배의 수업료를 내도 좋다고 했다. 큰 병에 걸려도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면 의료보험료가 더 오른다고 불평만 늘어놓지는 않을 것이라 했다. 월급의 반을 덜어가도 좋으니 학교 문제.병원 문제만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나머지 반이라도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하루 세끼 거르지 않는 다음에야 기약도 없는 집 장만에 매달릴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애쓰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여유있는 시간을 얻기 위해 힘쓰겠다고 했다.

나라님이 돈이 없어서 지금까지 그렇게 못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하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전부 허리띠를 더 졸라매자는 것이다. 너무나 엄청난 돈이 필요한 일이라서 그깟 월급봉투에서 몇 푼 더 들어낸다고 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지 속시원하게 알려주었으면 한다. 버는 돈의 반을 내놓고도 10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풀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당장 시급한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까지 너무 잘 안다. 이전에 했던 나라님의 말씀이 거짓이 되고 이제서야 진실을 말한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믿는다 해도 10년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면 너무나 막막한 세월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백년이 걸려서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이 고민하는 걱정이라면 나라님이 나서서 풀어야 한다. 혼자 힘써서 될 일이 아니기에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 살아 생전에 결실을 보지 못한다 해도 후손만큼은 반드시 누려야 할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따로 겪는 일들이 있고 함께 겪는 일도 있다. 따로 풀어야 할 숙제가 있고 함께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대체로 인간의 삶에서 같이 생각하고 같이 행동하는 것과 그렇게 얻어진 모든 것을 문화라고 한다면 문화적인 삶이라는 것은 결국 더불어 사는 삶일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함께 생각해야 할 일을 따로 생각하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숙제를 혼자 끌어안고 끙끙거려 왔다. 우리가 진정 더불어 사는 삶을 문화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정말로 바람직한 삶이라고 믿는다면 이제라도 우리의 고민들을 서로 내놓고 함께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실을 함께 거두고 보람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이다.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예술경영

◆약력: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예술경영전공 부교수, 서울대 대학원 음악학 전공(석사), 서울대 대학원 서양음악학 전공(박사과정 수료), KBS교향악단 운영위원, 세종문화회관 자문위원, 세계 종족무용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