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미들섹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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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어느날 물의 요정 살마키스의 연못으로 왔다. 이 멋진 소년에게 한 눈에 반한 살마키스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힘껏 껴안았다. 살마키스의 힘과 욕망이 너무나 강했기에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그녀를 떼어내지 못했고, 결국 둘은 서로 녹아들어 한몸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양성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저자인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그리스계답게 이런 그리스신화에서 따온 듯한 주인공을 창조해냈다. 주인공인 칼리오페는 여자아기로 태어나 여자아이로 자란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자라면서 여성으로 변신하지만, 칼리오페에게는 그런 변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열네살 때 칼리오페는 자신이 본래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들섹스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칼리오페는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인 칼이기도 하다. 칼은 나이가 든 뒤, 자신이 살아온 시절과 자신에게 양성을 물려준 부모와 조부모의 삶을 회상한다.

터키에 살던 그리스인인 칼의 조부모는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자동차 공업 도시인 디트로이트로 이주한다. 저자는 이 조부모부터 시작해 그리스인 이민자 집안의 역사를 80여년에 걸쳐, 시대와 지역이 변해가는 모습 속에 꼼꼼하게 담아냈다. 책에는 당시의 시대와 지역 생활상이 놀랍도록 상세하고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전쟁 속의 터키 마을, 매연과 악취로 가득한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의 모습이 대공황, 인종 폭동, 성해방 사조 등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흥미롭게 펼쳐진다.

저자는 그런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침울하지도, 격렬하지도 않게 유머와 경쾌함으로 포장해 술술 읽히게 만드는 놀라운 재능을 보여준다. 터키와 그리스 전쟁의 참화도, 대공황도,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겪는 고통도, 인종 갈등도,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도 지적 해학과 유머, 환상적 분위기를 통해 따스하게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은 신화.종교.인종차별.폭동.전쟁.세대간 갈등 등을 전혀 중압감 없이 그려낸 20세기 미국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 책은 자아뿐 아니라 성적 정체성까지 찾아야 하는 주인공을 다룬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칼의 조부모는 남매 간이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부부가 된 사람들이다. 이런 근친혼과 돌연변이로 생긴 염색체 이상이 대물림되어 칼은 양성인간이 된다. 유전자 이상, 어른들의 무심함, 양육의 힘으로 칼리오페는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자라난다. 하지만 사춘기 호르몬 때문에 칼리오페의 남성성이 서서히 드러난다. 유전자가 이긴 셈이다. 칼리오페는 여성에게 성적으로 끌리지만 그것을 숨겼다가, 자신이 여성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단정한 의사가 남성의 형질을 수술해 없애려 하자 질겁해 달아난다.

하지만 방황 끝에 칼은 자신의 양성을 받아들인다. 저자는 칼의 동료의 입을 빌려 말한다. 나바호족처럼 생물학적 '성'과 문화적 '젠더'가 있음을 인정하며, 성과 다른 젠더를 택해도 괴물 취급을 하지 않고 존경하는 사회도 있다고 말이다. 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적응하기 나름이라고. 저자는 유전자가 정한 운명에 짓눌리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을 경쾌하게 그리고 있다. 미들섹스는 주인공이 사는 집의 이름이기도 하다. 미들섹스는 미래와 과거가 공존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집이다. 그리고 주인공처럼 소수이기를 선택한 새로운 인류를 위한 집이기도 하다.

이한음(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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